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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 전시기간 : 2022.07.06 (수) – 2022. 07.20 (수)

* 월-토 10:00 -18 : 00 / 일요일 휴관

■ 전시 : 관람예약제 구글 폼 – 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cGEbmlZdF8R437Fm5MuqrQaiZi6nyYtqN5iQ691lPKfdORWw/viewform

■ 장소 : 부천시 석천로 380길 61 디포그 아트포럼리 스페이스 서버

■ 문의 : artforum.co.kr / artforumrhee@gmail.com T.82(0)32_666_5858

■ 주최 : 대안공간 아트포럼리

 

현존재로써의 자리

_시간을 묶은 삶의 자국으로서의 조각

홍경한(미술평론가)

1. 그동안 다양한 공간에서 작가 보라리의 작품을 접했다. ‘공간드로잉’이라는 수식에 맞는 설치작업이 주를 이뤘다. 일일이 꿰고 덧대어 제작된 노동의 산물은 조형적으로 유려했으며 ‘뜨개질’이라는 행위를 통해 빚어진 선들은 시간의 함축이자 내적인 모든 것들의 총체였다. 특히 선(線)은 각각의 편린이 담긴 감정의 획이었고, 또 하나의 세상과 같은 공간에 내걸리며 비로소 얽히고 얽힌 인간사와 관계를 드러내는 그만의 언어였다. 

하지만 작업의 도출 구조는 진도가 더딜 수밖에 없는 수작업을 선택한 이유와 대체(代替) 할 만한 재료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적지 않은 기간 내 곁에 머물렀다. 그러던 중 오는 7월 개최 예정인 ‘아트포럼리’에서의 개인전을 앞둔 얼마 전, 작가를 만났다. 

먼발치에서 혹은 공식 행사에서 간단하게 한두 마디 나눈 것을 제외하곤 대면한 적 없는 작가와의 대화는 길지도 짧지도 않게 이뤄졌다. 그는 유쾌했고 진솔했다. 예술가로서 걸어온 삶의 단락들을 일부분 엿볼 수 있었으며 매체의 실험과 확장, 미의식에 관한 부분도 열람할 수 있었다.

보라리의 작업은 존재의 근원적인 것과 변하는 것 어디쯤에서 부유하는 것들, 즉 ‘기억’과 ‘불안’,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그에게 창작의 동기를 부여해온 것은 칸트(Immanuel Kant)가 말한 ‘알 수 없는 그 무엇’이지만 ‘기억’과 ‘불안’, ‘두려움’은 보라리 작업의 연속성과 행동을 일으켜온 원인이다. 공간에 감정을 대입하거나 시간의 층위를 새기는 것도 모두 여기서 비롯된다. 

이러한 요소들은 삶과 밀접할 수밖에 없다. 그는 삶의 경험에서 비롯된 ‘기억’의 잔재들을 ‘시간의 선’으로 압축하여 공간에 묻는다. ‘집적(集積)’된 기억은 완전한 형체를 갖지 않으나 드물고 성긴 망각으로 인한 잔재는 짙다. 기억은 경험된 시간을 소환하고 축적하며 축적된 기억은 불안을 초래하고, 이 불안은 다시 재-경험의 두려움으로 전이된다. 작가는 언제나 이와 같은 순환의 무대에 선다. 살아가는 와중에도 불쑥불쑥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지만 현재는 실존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기억을 사회적 관계망이랄 수 있는 공간에 누적(累積)시키고 해체하거나 한 조각 비늘 같은 감정의 조각들을 산포한다.  

이중 ‘불안’은 그의 행위를 이끄는 실질적인 요소다. 그는 한 올 한 올 실을 꿰어 이으면서 문제의 불안을 희석시킨다. <Black Tower>처럼 더디게 쌓아올리며 엄습하는 많은 것들을 잠재우려 한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이는 “‘불안의 유형화’를 통해 두려움의 순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이다. 

불안이 흩어짐을 갈급해 한다면, ‘두려움’은 미완의 실체를 앞당긴다. 구현(具現)의 발로가 되고 공간을 장악하는 설치의 배경이 된다. “아직 오지 않은 불안에서 오는 고통을 손에 잡히는 형상으로 드러내 보인다.”는 작가의 발언은 이와 같은 필자의 해석을 뒷받침한다.

‘공간’은 물리적인 영역과 심리적 영역 간 교통하는 장소다. 존재감을 스스로 확인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는 이곳에서 내안의 나와 만나는 과정을 밟는다. 삶에 드리운 모든 것들에서 잠시 벗어나 온전히 ‘나’를 돌아보며 다가서지 못한 시간들, 마음을 가득 채운 것들, 내면에 쌓인 많은 것들의 공존과 와해됨을 본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뜨개질로 만든 <불안의 유형화>(2020) 시리즈를 비롯한 <달그림자>(2020), <지속된, 그리고 낯선>(2020), <당신과 나 사이>(2016), <bora201303>(2013) 등이다. 2014년 대담미술관 초대전에서 선보인 <201408_대담징검다리> 연작이나 <Bora201003>(2013), 평면작업인 수채화 <폭풍, 성 탑>(2020)도 매한가지다. 여기엔 공간에 주목한 설치작업 <한정된 공간 #>(2021) 연작도 포함된다. 

2. 예술적일 수는 있어도 예술은 불가능한 일부를 제외하곤 예술이 그들에게 약속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을법한 행복이 예술가들의 삶에선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주변을 배회하는 건 언제나 불안과 초조함이다. 무언가를 창작하는 예술가에게 예술은 그 자체로 두려움이요, 막막함이다. 

공허한 공간 앞에서 체감하는 상실된 좌표와 무덤 속의 평화와 진배없는 작업실의 무게감은 경험해 보지 않는 한 모른다. 그 무게를 말이나 글로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리고 만든다. ‘전시 기간 내내 뜨개질을 하며’ 육중함을 버텨낸다. 이는 보라리가 말하는 ‘불안의 유형화’와 그리 멀지 않다.

‘불안의 유형화’가 내적인 것에서 출발한다면 보라리 작업의 또 다른 명제인 ‘리듬의 유형화’는 계획과 실천방식으로 나타난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기억과 불안, 그 사이에서 가지도 않고 남지도 않은 그 무엇…, 그 둘을 관통하는 또 다른 시점을 만들려는 시도”이다.

‘리듬의 유형화’는 숱한 선들이 천장에 매달리고 바닥에서 길게 공간을 가로질러 표현된다. 그 사이마다 리듬이 있다. 작가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기억을 담고 사회 속 존재자로서의 위치를 녹인다. 내용은 상당히 다면적이다. 자아와 초자아, 리비도가 섞이고 일상에서 건져 올린 흔적을 녹여 내거나 의지와 상관없이 만들어지는 단면들을 투사한다. 공허와 상실도 담겨있다. 이외 운명과 기질이 요청해온 것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예술가로 서 있음으로써 확인되는 것들도 개입된다. 

보라리는 이를 정교하고 치밀하나 무르고 약하진 않은, 거대하지만 지나친 강박은 노출되지 않는 공간으로 꾸민다. 불안의 찌꺼기들과 기억의 여백들조차 유형화되고 행복과 희망이라는 명사들이 평평하게 위치할 수 있도록 설정한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세련된 선의 운율일 수 있으나 그 내부엔 이처럼 다양한 것들이 녹아 있다. 

보라리의 공간은 리얼리티보다는 추상적으로 접근할 때 해석이 수월하다. 무형의 고정된 것에 유동하는 것들을 옮기며 거둬내고 심고 삭제하려는 의지 혹은 노력으로 보는 게 적절하다. 이는 숙명과의 대결에서 늘 패배하면서도 지키려 했던 것에 관한 몸부림이자, 결코 녹록치 않은 현실세계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오고 살아가는 과정에서의 모든 것들이 실존으로서의 나를 되묻는 시간으로 봐도 상관없다.

3.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새로운 조형 <Black Tower>(2021) 시리즈는 앞서 거론한 작업들과는 결이 약간 다르다. 기본 구조는 대동소이하지만 이들 연작은 공간을 포박하는 앞선 작업과는 달리 ‘이야기’에 집중한다. 불안으로부터의 빛과 희망을 기다리는 가상의 존재를 위치시키고, 집적의 층위마다 서사를 들여놓는다. 그래서인지 이전 공간드로잉이 일종의 자유시(詩)와 같다면 이번 작업은 에세이마냥 다가온다. 

<Black Tower>는 ‘성탑’이라는 구체적 형상을 갖는다. 이 성탑은 어두움과 밝음이 교차하는 자리다. 공들여 쌓았으나 이내 어디론가 숭숭 빠져나갈 것만 같은 헛됨이 알알이 박혀있기에 물질로서의 질량과 촉감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허상처럼 다가오는 측면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성탑이 가리키는 건 ‘나’에 대한 나 스스로의 방어를 의미하는 한편,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채 나를 가두는 양가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를 보호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였을까. 보라리는 <Black Tower> 시리즈에선 재료에 변화를 준다. 기존 털실(폴리에스터, polyester)라는 합성섬유에서 벗어나 공기와 만나면 이내 고체로 변하는 플라스틱 계열로 바뀌었다. 공공미술이나 미디아트로의 영역 및 매체확장을 도모하는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효용성에 비례한 일시적 사용일 수도 있으나, 재료의 차이에 의한 여운의 확연함은 분명하다. 그리고 나쁘지 않다. 털실 뜨개질 작업이 비교적 정서적이었다면, <Black Tower>는 정적인 조각, 건축적인 양태를 내보인다. 

점층적으로 쌓는 행위는 변함없다. 그물 같은 얼개를 만들어 대략적인 형태를 잡은 후 일일이 덧댐을 반복한다. 하나의 작품이라도 어느 부분은 밀도 있게, 또 다른 부분은 듬성한 상태로 남겨둔다.   

공간의 해석에서도 다소의 간극이 엿보인다. 보라리 작가의 이전 작업은 털실과 뜨개질을 이용해 공간에 선 드로잉을 연출하는 설치였다.(물론 평면작업도 있다) 실을 이용하여 선을 만들고 공간을 채웠다. 선은 기억의 저장고였고, 공간에 풀어 놓은 선은 ‘불안의 유형화’와 ‘리듬의 유형화’를 대신했다. 그곳에 경계는 없다. 공간 전체가 작품의 일부였으며, 확장성을 지닌 공간에서의 다변적 리듬은 기억과 불안의 구획마저 흩트려 놨다.

<Black Tower>는 겹겹이 쌓는 행위의 목적이나 결과보다는 그 행위와 이행자체가 중요하다. “중첩되고 반복적으로 분산되는 공간의 기억들을 시간의 선으로 지속시키는 것”에서 내재된 무형의 언어를 통해 존재의 근원적인 것과 변화하는 것, 그 사이에 서 있는 현재에 관한 서술로 변화하고 있다. 특히 <Black Tower>의 꼬이고 뒤틀어진 검은 형상에선 신화적 염원이 담긴 생명소(生命素)로서의 위치를 갖는다. 전시장을 메우던 ‘양의 공간’은 실제적이고 암시적인 공간으로 이행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보다 사유적이다. 

<Black Tower>는 내재율이 담긴 삶의 자국으로서의 조각임을 보여준다. 실존이라는 화두가 깊게 안착되고 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존재양식에 대한 문제요, 세계내존재에 관한 자문이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선택을 제한·제약하는 상황 속에서 어렵고도 힘들게, 그러나 조금씩 현존재로써의 자리를 생성해가고 있는 그곳에 <Black Tower>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