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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숙 초대전 아트포럼리 아트포럼리 아트포럼리 아트포럼리 아트포럼리

최명숙 초대전

<비로소 만난 것, 들>

2026.09.18(금)-10.16(금)

아트포럼리는 2026년 9월 18일부터 10월 16일까지 최명숙 초대전 《비로소 만난 것,들》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아트포럼리 시각예술창작가, 연구자, 기획자 네트워크인 <세포를다시조직하라> 프로젝트의  2026년 참여작가의 첫 전시이기도 하다.

<세포를다시조직하라>는 공동학습(CoP), 연구자 워크숍, 현장 리서치 과정을 통해 기후재난 시대이자 복합위기 시대에  인간 중심적 관점에서 벗어나 패러다임을 전환하기 위한 연구와 실천을 도모해 왔다. 올해는 분단, 경계, 이주라는 주제로 지정학적,지경학적 위기와 기후 재난이 교차하는 지점을 탐색중이다.

최명숙은 오랫동안 자연의 풍경을 그려왔다. 2011년부터 14년까지는 시간에 따른 자연의 변화를 선과 색으로 기록해 왔다. 그러다 2015년 이후부터는 좀더 구체적인 ‘장소’의 풍경으로 옮겨진다. 사려니, 곶자왈, 다랑쉬, 중산간 등장소의 식물을 그렸다. 

우도창작스튜디오에 입주(2022)한 후에는 길에서 만난 풀들과 더 가까워진 시선으로 그린다. 목탄은 풀과 함께 존재하는 빛, 바람 등의 생동감을 표현하는 효과적인 재료로 사용되었다. 1년간의 우도 생활 이후 도시로 돌아와서는 보도블록 사이, 아스팔트 틈, 하수구 주변, 재개발 지역 등 인간관리체계 밖에서 존재하는 식물들로 시선이 옮겨진다.

힘껏 기세좋게 자라난 이름모를 풀들을 ‘도시개발로 인한 피해자’ 혹은 손쓸수 없이 마구 자라나는, ‘불필요한 존재로 구별’되어 진 대상이라는 연민섞인 시선에 문득 인간 중심적 가치체계가 투영되어 있음을 자각한다.

2026년 작가노트에서 ‘관찰은 관찰대상이 아니라 관찰자인 나를 변화시킨다.’라고 밝힌다.매일 산책을 하며 만나는 식물을 관찰하고 계절과 환경의 변화를 기록하며 시간을 겹겹이 축적한다. 제주풍경을 그리던 당시에 비교하면 화면의 선과 색이 식물의 재현이라기 보다 식물과 마주한 시간의 흔적임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최근에는 도시의 인공물(하천옹벽, 벽돌벽, 하수구, 수도계량기 등)들을 전면에 드러내고 거친 선으로 주변에 자라난 풀들을 그렸다.  작가는 “인간은 식물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 식물은 다시 도시의 삶과 풍경을 변화시킵니다.”라고 작가노트에 썼다.

전시<비로소 만난 것, 들>은 작가 최명숙의 15년간의 작업 흐름을 비교적 한눈에 볼 수 있다. 자연을 그린 풍경화에서 구체적인 장소를 선정하고 그곳의 식물을 그리다 도시개발로 급격히 바뀌어 가는 상황 속 비인간 존재들이 서로 살아내는 치열한 공간이었음을 자각하고 더 오래 머물고,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허리 숙여 만난 존재로 화면을 ‘비로소’ 채웠다.

대안공간아트포럼리 책임큐레이터 이주연

아트포럼리

보이지 않던 풀들,

다시 보이는 풍경들

이규원(문화인류학 연구자) 

  길을 걷다 보면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풀들이 있다. 콘크리트가 갈라진 틈이나 보도블록 사이, 하수구 아래와 같은 좁고 척박한 공간에서도 풀은 자라나고 다시 사라진다. 이러한 풀들은 풍경으로 인식되지 않고 도시의 배경에 머물며 이름을 불러주는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그러나 작가는 이러한 식물들을 오래 바라보고 기록하면서 익숙한 도시의 장면 속에 있었으나 좀처럼 보이지 않던 존재들을 불러낸다. 섬에서 머무는 동안 우연히 마주친 이름 모를 풀들을 계기로 시작된 풀에 대한 관찰과 기록은 도시로 돌아온 뒤에도 이어졌고, 이제는 사람들이 떠나고 재개발이 진행되는 도시의 한복판에서 다시 자유롭게 자라는 풀들을 향한다. 인간의 생활을 위해 정리되고 지워지는 공간의 틈에서 아무도 돌보지 않아도 뿌리를 내리고 생장하는 풀들이 작가의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이처럼 자연을 향한 시선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해왔지만 그러한 이동은 단순한 소재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으며 이는 자연을 바라보는 작가 자신의 시선이 변화해온 과정과 맞닿아 있다. 따라서 무엇이 새롭게 보이게 되었는가와 함께 무언가를 풍경으로 보게 하는 시선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물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작가의 이전 작업은 자연을 재현한 그림이라기보다 자연을 하나의 풍경으로 구성하는 작가의 시선을 보여준다. 가라타니 고진은 ‘풍경의 발견’이라는 테제를 통해 자연이 처음부터 하나의 풍경으로 주어져 있다는 생각을 뒤집는다. 풍경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을 단순히 옮겨놓은 결과가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하는 인식의 구조 속에서 성립한다. 전통적인 풍경화가 자연을 조망하여 전체적인 경관을 구성한다면 작가의 이전 작업에서 자연은 가까이 들여다보는 시선을 통해 풍경으로 나타난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풀들의 군집은 넓은 자연을 보여주기 위해 흩어져 있는 배경이라기보다 그 자체로 하나의 공간을 이루며, 풀들의 가느다란 선과 겹겹이 쌓인 형상은 대상을 충실히 재현한다기보다 작가가 경험한 자연을 회화적으로 다시 구성한다. 화면의 색채 역시 실제 풀의 색을 그대로 옮기는데 머물지 않고 다양한 색조를 중첩시키며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그 결과 이 풍경은 특정한 장소의 경관이라기보다 작가의 감각과 심상 속에서 경험된 자연이다. 다시 말해 작가의 풍경은 자연의 복제가 아니라 자연을 바라보고 조직하는 하나의 방식을 드러낸다.

  이때 작가와 풀의 관계는 단순한 시각적 관찰에 머물지 않는다. 이전 작업에서 풀은 단순히 바라보는 사물이라기보다 시간의 흐름을 함께 견디고, 살아가며, 때로는 꿈을 꾸는 존재처럼 다루어진다. 풀의 생장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자연에 대한 정서적 친밀감이 스며들어 있으며, 이를 통해 자연은 작가의 외부에 놓인 객관적인 대상이 아니라 감정과 상상이 개입된 세계로 경험된다. 그러나 최근 작업에 이르러 자연에 인간의 감정과 의미를 투사하는 정서적 접근은 재검토된다. 작가는 도시의 풀들이 인간의 가치와 쓸모에 의해 꺾이고 뽑히는 모습을 보며 처음에는 그들을 불쌍하고 가엾은 존재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후 그러한 감정이 지극히 인간적인 시선으로 풀들의 삶을 판단하고 평가한 결과일 수 있다고 스스로 의심한다. 중요한 변화는 풀에 대한 생각 자체보다 자신이 풀을 바라보는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작가가 인간적인 의미 부여를 경계한다고 하여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위치로 물러서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자연을 인간과 분리된 독립적인 대상으로 설정하는 태도와 다르다. 자신의 해석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바라보는 과정에서 무엇을 덧붙이고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의식함으로써 그 관계를 다시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작업에서 풀들은 더 이상 작가가 감정을 투영하는 수동적인 대상에 머물지 않는다. 풀을 바라보는 일이 오히려 작가 자신의 인식과 감각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면서 보는 행위의 방향이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과정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작가가 발견한 것은 인간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자연이라기보다 자신의 시선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자연이다. 그리고 바로 그 불충분성이 이번 작업의 출발점이 된다.

  그렇다면 자신의 시선을 의심하게 된 작가는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작가의 풀에 대한 ‘말 걸기’에서 찾을 수 있다. 작가는 이번 작업에서 도시의 식물과 그들이 살아가는 공간을 반복해서 관찰하고 기록하고, 식물의 특성을 조사하고, 이름을 붙이고, 채집한 자료를 모아서 식물 일기를 만든다. 이러한 맥락에서 ‘말 걸기’는 식물이 가지고 있는 어떤 목소리를 인간의 언어로 옮기는 행위라기보다, 관찰과 조사, 이름 붙이기, 기록과 회화라는 여러 ‘매개’를 통해 식물과 인간 사이에 새로운 관계의 경로를 만들어가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브뤼노 라투르에 따르면 매개자는 의미를 손상 없이 전달하는 투명한 중간자가 아니다. 매개 과정에서 대상의 의미와 관계는 변형되고, 번역되며,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작가가 자연을 바라보는 과정 역시 그러하다. 작가의 작업에서 자연은 단순히 하나의 회화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풀과 그것을 둘러싼 도시 공간, 작가의 관찰, 조사 자료와 기록, 그리고 회화가 서로 연결되면서 풀을 만나는 방식 자체가 새롭게 구성된다. 회화는 자연을 대신하는 최종적인 발화라기보다 자연과 인간 사이에 여러 개의 매개를 연결해가는 과정의 일부가 된다.

  이때 작가가 풀의 독립적인 삶을 인정하기 위해 자신의 의미 부여를 경계한다는 사실과 풀을 끈질기게 관찰하고 조사한다는 사실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해석만으로는 풀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자각이 있기에 관찰은 계속될 수 있다. 작가는 풀을 자신의 감정이나 가치관에 맞추어 의미화하기보다 식물의 이름과 특징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시선을 끊임없이 수정한다. 이 관계에서 풀은 더 이상 인간이 의미를 부여하는 수동적인 대상이 아니다. 풀을 바라보는 과정이 오히려 작가의 인식과 작업 방식을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풀 역시 작업의 방향에 개입하는 존재가 된다.

  이러한 변화는 이번 작업에서 자연과 도시가 맺는 관계로 이어진다. 최근 작업에서 풀은 도시와 분리된 자연의 일부로 등장하지 않는다. 건축물과 도로, 콘크리트와 같은 인공적 구조와 식물의 유기적인 선이 하나의 화면 안에서 서로 포개지고 얽히면서 자연과 도시를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장면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이는 자연에서 도시로의 이동이나 자연과 도시의 단순한 결합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풍경은 그 자체로 온전한 자연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이 관계를 맺으며 구성되는 공간이 된다. 이제 회화 속의 풀은 자연을 대표하는 상징도 인간에 의해 억압받는 피해자도 아니다. 풀은 도시의 구조와 함께 살아가며 작가의 시선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구체적인 존재다. ‘비로소 보이는 것들’은 바로 그 관계를 포착한다. 보이지 않던 식물을 새롭게 보는 것은 단순히 이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도시의 풀들을 발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연을 바라보는 자신의 방식을 다시 보는 일이며, 결국 풍경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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