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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병 “HYPER REAL” 윤치병 “HYPER REAL” 윤치병 “HYPER REAL”

윤치병 “HYPER REAL”

 

 

 

 

 

■ 전 시 명 : HYPER REAL

■ 작 가 명 : 윤치병

■ 전시기간 : 2023.11.16 (목) – 2023.12.21 (목)

* 월-토 10:00 -18 : 00 / 일요일 휴관

■ 장소 : 부천시 조마루로 105번길 8-73 대안공간 아트포럼리    1F 아트포럼리 갤러리

■ 문의 : artforum.co.kr / artforumrhee@gmail.com T.82(0)32_666_5858

■ 주최 : 대안공간 아트포럼리

■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윤치병의 하이퍼리얼

오정은(미술비평)

윤치병은 아카데믹한 작가다. 이런 수식이 현대미술 작가에게 칭해져온 일련의 금단을 건든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 윤치병의 작업은 문자 그대로 ‘잘 그린 그림’이고, 보이는 사실을 테크니컬하게 잘 묘사하고 있으며, 회화의 기본에 충실하고 작가 주관은 절제된 편에 있다. 실제로 작가가 쌓은 이력은 국내 아카데미 미술의 정석 표본을 보여준다. 수업중 제자의 재능을 알아본 고교 미술 선생님의 추천으로 실기 미술에 입문해 명문 미대인 홍익대 회화과에 입학했고, 사실주의 화풍으로 학업과 작업을 병행해온 한편 미술학원과 예고 실기강사로 근 20년간 경력을 쌓았던 것이다. 전시 이력으로 치면 경력 단절의 시기가 빈번하고도 짧지 않은데, 쉬지 않고 계속 그림을 그렸는가로 물으면 답은 긍정적이다. 생업의 노동과 예술이 일치한 그의 지난날은 미술의 제도 안에서 규칙적으로 다량의 작업량을 생산해 내게 했으니 말이다. 다만 그들 그림을 작가가 자기 작업의 연장선으로 다 보는지의 여부는 아직 결정을 미뤄야 옳다. 필자 역시 그 고민에 동참하며 본 글을 쓴다. 이는 회화에 오랫동안 천착해온 재현의 강박이 추동한 리얼리즘 화풍, 그리고 재현의 정도와 기교에 특정 보편의 수준을 요하는 아카데믹의 화풍, 이어 그들 교집합 선상에서 지각되고 위치 지어지는 윤치병의 화풍에 대해 서로 분류하거나 때로는 엮어가며 사유하는 일이 될 것이다.    

윤치병의 그림은 절정의 기교를 드러내왔다. 친구나 가족 등 그와 가까운 인물이나 주변의 일상 사물을 모델로 재현해온 그의 기술력은 초기부터 이미 거의 완숙한 정도에 이른 것으로 보였다. 이에 대학 재학 때부터 화랑가의 관심을 받았던 그의 회화는 대개 평범한 대상을 과장없이 그려 아름답고 유려하지는 않지만, 사진을 찍은 것처럼 섬세하며 적나라했다. 정답에 가까운 모범으로서 입시미술계에서 시범작으로 소비됐고, 학원가에서는 강사의 능력치를 드러내며 일종의 홍보 수단도 되던 작품이었다. 반면 그가 작가로서, 즉 미술계의 공인된 전시를 의식하며 유화로 그린 것은 주로 2000년대에 제작된 것과 2023년 올해 개인전을 준비하며 다시금 대형 캔버스에 작업을 시작한 몇 작품이다. 그 사이 시간의 긴 공백은 아카데믹풍 소묘나 수채화가 자리를 채우고 있다. 도제식 교육의 일환이거나 거기 안에서 통용되던 미학으로부터 작가적 정체성을 추출할 수 있을까? 이 물음은 다소 일차원적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일련의 과정이 윤치병에게 부정할 수 없는 자기 일생의 시간이고, 지금까지 다져진 회화의 경로라는 점이다. 미화하고 왜곡하는 것 없이 보이는 대로를 숙련하여 왔고, 그것이 곧 독자성이 된 작가 윤치병이다. 그의 하이퍼리얼도 그렇게 자기 삶의 실재를 기반으로 그려졌음을 알아야 한다.

대학 동문과 함께 한 《사진, 그림이 되다》(갤러리 나우, 2019)에서 윤치병은 종이에 연필, 수채화로 그린 초상화 세 점을 나란히 전시했었다. 사진으로 본 유명 여성 연예인과 모델, 그리고 작가의 친남동생을 묘사한 거였다. 당시 전시의 유튜브 인터뷰에서 윤치병은 ‘다른 일하는 게 있어 간단하게 준비했다’면서 그들 작품을 소개했었다. 상대적으로 손이 많이 가고 오래 걸리는 유화에 비해 가벼운 매체로 그렸다는 뜻으로 ‘간단함’을 말했을 것이다. 더불어 생업의 버거운 비중을 자기변명으로 삼은 듯하다. 이유야 어찌 됐든 그런 ‘간단함’은 윤치병이 나름 표해온 하나의 특성이었고, 본업과 부업을 병행해온 현실에 더해 아카데미 미술과 순수 창작 사이에 일말의 혼돈과 혼란을 내던 것이었다.

2023년 여름, 학원 강사 일을 접고 작업 시간을 늘린 윤치병은 부천의 아트포럼리 지하공간에 입주해 유화 그리기에 매진했다. 짐작하겠지만, 이는 전의 ‘간단함’과는 대조되는 본격적이고 복잡한 시동이었다. 먼저 그는 ‘사람을 그리고 싶고, 잘 그리고 싶다’는 오랜 비전을 유효하게 둔 채, 다만 자기 관행처럼 굳혀온 전작의 습성은 약간 탈피하고자 했다. 20년 전의 작품에서 윤치병이 주로 증명사진과 같은 정면 포트레이트 구도 및 느낌을 인물화에 가져와 써왔다면, 신작에서는 유리벽에 막혀 마구 일그러진 안면의 인물화를 시도했다. 대칭과 비례의 안정성을 일부러 깨고 추한 표정에 순간적 동세를 띠는 얼굴을 극사실의 기법으로 그렸다.

신작과 함께 전시를 준비하면서 윤치병은 재현의 강박과는 다른 또 다른 압박감을 느꼈다. 개인전을 구성할 작업 간 동질의 주제, 자기 작업 색을 꾸미는 형용사를 두고 그랬다. 이렇게 작가로서 필연적인 곤궁의 처지는 눈앞의 벽에 갇혀 물리적 난항에 처한 신작의 인물 도상과도 유사하게 맞물린다. 전작의 회화가 작가 자신과 주변의 관계 내지 사회적 인물을 보았다면 신작의 회화는 지금 작가 내면과 상황이 투영된 혼잡의 인물에 가깝다. 기존 환경에서 오래 굳혀진 표현력은 신작에서도 통용되는 기교로 능숙하게 처리된 동시에, 더 잘하고 싶고 동시에 깨부수고 싶은 화가의 손기술로 양가에 둘러쳐진 것이기도 했다. 작가는 ‘잘 그린 그림’으로 호명되어 왔던 자기 작업의 과거형 수사를 딛고, 맞부딪히고, 새로이 하려고 한다.

하이퍼리얼(hyperreal). 필자가 이 전시 제목을 제안할 때, 윤치병은 리얼(사실)과 진실을 동급으로 추구하려는 것 같았던 기억이 난다. 그는 자기 회화를 더 진실되게 묘사하고 싶어 했다. 더욱 정교하면서도 마음에 동하게 그려 인간의 지각 한계 이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여전히 회화 안에 잠재해 있음을 알기 때문일 거다. 마치 스마트폰 카메라가 신규 출시 때마다 계속 화소수를 높여가며 시각 정보를 끝없이 업그레이드하고 일상 사진의 미학도 따라 발전하게 하듯이, 회화의 영역도 그렇다고 본다. 우리는 그 기술력과 미시적 삶의 진보에 계속 열광하고 매혹 당하지 않는가.

윤치병은 또, 자기 작업의 미흡한 지점을 계속 발견하고 다음의 지극한 이상에 층위 높여 전진해가려는 작가적 욕망을 지우지 않은 것 같다. 이에 형상이 분명하고 물감이 다 건조된 캔버스를 두고도 완성이라 자족하는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 한편, 동시대 미술에서 회화는 이미 오래된 전통적 매체로 진부한 재현의 관습을 버려오고 있다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캔버스에 변화구를 던지며 자기 언어를 마구 창안해 내는 중이다. 기존처럼 인물에 중심을 둔 채 사람을 그리고 회화를 내리 그린다. 무덤덤한 표정에서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안면의 인물화까지 이어지는 윤치병 작가의 작업 연대기다. 여기에는 국내 아카데미 미술의 역사도 산증인처럼 발화되고 있다고 여겨진다. 나는 윤치병의 그런 표현 자체가 오늘날의 하이퍼리얼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 진실은 아직도 그려지고 있다.

 

 

 

 

 

1. 보이지 않는 벽1_캔버스에 유채_162x130cm_2023

 

 

 

 

2. 보이지 않는 벽2_캔버스에 유채_130x194cm_2023

 

 

 

 

3. 만날 수 없는_캔버스에 유채_53x45.5cm_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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