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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Be the Resistance〉 이하 〈Be the Resistance〉 이하 〈Be the Resistance〉 이하 〈Be the Resistance〉 이하 〈Be the Resistance〉

이하 〈Be the Resistance〉

대안공간 아트포럼리 ‘현장전’

이하 Lee Ha

<Be the Resistance>

2015.06.22(Mon) – 07.18(Sat)

리플렛앞면

대안공간아트포럼리 기획초대 2015현장전 -이하의 Be the Resistance-

 

대안공간 아트포럼리는 예술의 사회적 기능과 예술가의 책임, 미술의 힘에 대해 고민하고 기존 미술제도 안에서 벌어지는 미술의 관행을 확장하기 위한 동시대미술의 현장의 다양한 시도들, 현장성이 강한 기획전을 개최해 왔다.

2006년 예술창작그룹 ‘그림공장’ 기획초대전 ‘살자’전을 기점으로 대안공간들이 추구하는 각자의 ‘대안’과 변별되는 대안에 대한 모색을 시작했다.

2012년에 들어 조직 체계라 할 수 없는 무형의 조직으로서 자율적이고 즉자적으로 움직이는 파견미술가와 그들을 현장에 있게 한 사회의 현상, 35명의 파견미술가가 그것을 받아들여 내온 이미지를 조명한 <나를 파견하라>전시와 15명의 파견미술가를 인터뷰한 도큐멘터리집 발행 한 바 있다.

이후 파견미술가들의 개별적 면면을 조명해 보고자 2013년 ‘전진경의 아는사람’전과 ‘이윤엽의 윤엽’전을 개최했고 같은 맥락에서 2015년 6월 ‘이하의 Be the Resistance’전을 개최한다.

‘난 어느 순간 유명인이 되었지만 내가 의도한 것은 아니다. 솔직히 유명해지는 것이 즐겁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 ‘는 작가의 말처럼 작가 이하는 문화면보다 사회면에서 훨씬 더 주목하는 그야말로 핫?한 작가가 되었다.

국가 폭력에 맞서기 위해 동어 반복적인 정치적 발화가 갖는 양가성, 그 ‘무용無用한 능력’(이빛나), ‘귀여운 독재자’시리즈와 같이 세계 각국의 독재자들을 대중적 이미지로 재현한 팝아티스트(나여랑), 중립적인 이미지에서 오는 풍자적이거나 반 엄숙주의(이윤영)와 같은 한 작가에 대해 서로 다른 시각들을 기소문이 아닌 비평글로 담아 작가에 대한 입체적 조명을 하고자 하는 것은 작가로서의 뻘 짓이 갖는 의미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작가 이하와 그의 작업에 주목하는 3인의 청년비평가들은 아트포럼리에서 올해 처음 시도한 비평가레지던시 ‘사유게르’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비평가들로 이하작가를 중심으로 한 1:3 비평을 내온 것이다.

이번 ‘Be the Resistance’전은 2011-12년의 귀여운 독재자시리즈와 Tears 시리즈부터 최근 동물시리즈와 Skin시리즈까지 40여점의 작품과 홈페이지에 게재하였던 그림일기 그리고 전시가 이루어지는 공간을 고려한 설치작업까지 이하의 작업경향을 한눈에 알 수 있는 대규모 개인전이 될 것이다.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대상을 그리고 그것이 담고 있는 주제 또한 어렵지 않게 읽혀지는 것은 예술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작가적 고민이 반영이 된 것 같다. 뉴스를 통해 익히 알고 있던 이미지들도 함께 전시가 되어 작품이 주는 선명성에서 비롯된 쾌와 불쾌의 미에 대한 찬반도 예상되지만 우리 또한 직면하고 있는 일상과 시국에 즉자적으로 반응하는 동시대 미술의 현장성을 확인하길 바란다.

                                                                                                                                                                        ■대안공간아트포럼리

 

2015 비평가 레지던시 사유게르

 

의도와 반응이 엇갈리기 시작한 순간,

재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미워도 다시 시리즈’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면 시선이 집중된다. 비슷함과 다름이 공존할 때 다름은 더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시리즈’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 ‘이하’의 작품들도 시리즈이기에 ‘다름’이 부각 될 것이다. 게다가 이하의 작품들이 시리즈로 묶여 있다는 점은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맥락적으로 보아주었으면 하는 강한 메시지가 담겨있다. 하지만 자신의 의도의 흐름이 효과적으로 드러난 시리즈와 그렇지 않은 시리즈가 있다. 또한 ‘그렇지 않은 시리즈’의 경우 작가가 의도가 제대로 읽히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구현과 반응의 괴리가 굉장히 커진다. 하지만 의도와 반응이 엇갈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작가 이하의 작품들은 재미가 생기기 시작한다.

 

목적전도(目的傳導)

이하는 여러 경로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거리로 들고 나간다. 그가 들고 나간 작품들의 대부분은 2012년 이후의 작품들이다. 대표적인 작품들로는 2012년 발표한 독재자 시리즈가 있다. 이는 자신이 독재자라고 생각한 리더를 패러디한 시리즈이다. 이하가 그린 인물들은 주로 근현대사에서 주목받았던 각국의 독재자들인데, 알록달록한 색채가 강조된 꽃밭을 배경으로 그려진 반신상이 대부분이다. 이들 작품은 단순히 인물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변형한 패러디 초상화의 특성과는 조금 다른 성향을 보인다. 슈퍼맨이나 람보, 백설공주 등 대중적 캐릭터에 실제한 인물들을 오버랩하는 식으로 표현했는데 색채의 대비가 뚜렷하고 원본이 되는 캐릭터의 특성이 침범되지 않는 선에서 구현된다. 작품 마다 원본 차용의 정도는 모두 다르다. 이러한 점은 남녀노소 누구라도 자신이 가진 선험적 이해의 범주만큼 사고하고 해석할 수 있을 만한 여지를 준다. 명확한 두 개의 캐릭터를 조화한 하나의 그림이 보는 이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부분은 이하의 독재자 시리즈가 가지는 의외의 운동성이다. 정확히 말하면 해석의 운동성이 활발하다는 것이다.

 

비판이라는 의도 대신 얻은 리듬감

독재자 시리즈 각각의 작품의 배경으로 그려진 꽃밭은 큰 변형 없이 반복적으로 활용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런 양상 때문에 각각의 작품에 생명력이 더 부여된다. 같은 배경에 다른 캐릭터를 집어넣고, 또 여기다 다른 인물들을 조화시켰기 때문에 새로이 이입한 인물의 특징이 더 부각되는 시각적 효과가 생긴 것이다. 여기서의 생명력은 각 인물의 특징이 얼마나 집중도 있게 드러나는가를 의미하는데 독재자 시리즈의 작품들은 작가가 생각한 인물들의 행적이 작품에서 드러난 인물의 특징이 된다. 게다가 팝 아트를 연상시키는 강렬한 색채의 대비와 강조와 소멸이 공존하는 리듬감 있는 표현을 통해 구현된 인물들의 특징이 작품의 생기를 더하였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작가는 지도자들의 독단을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로 독재자 시리즈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이 시리즈는 팝 아트에서 쓰이는 강렬한 색채의 대비가 가져오는 리듬성과 패러디에서 자주 활용되는 인물 풍자가 작품 내부에서 결합되어 뜻밖의 시각이 탄생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재자 시리즈는 작가의 농도 짙은 정치적 성향에 기반하여 작정하고 만든 시리즈임에도 불구하고 본래의 목적의식보다는 작품 자체로서의 리듬감이 더 부각되었다.

 

초상화의 본질에 도전하는 아이러니한 독재자 시리즈

초상화라는 것이 본래 사람의 얼굴이나 모습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생겨난 만큼 오늘날에 와서 역사나 풍속의 연구 자료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특히 동양의 초상화는 단순히 인물을 그리는 데만 그치지 않고, 그 정신까지도 옮겨 그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 점을 미루어 볼때 이하의 독재자 시리즈는 권력의 중심에 있던 인물들의 행적을 기록을 위한 목적과 동시에 표현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오마쥬 하려고 했는데 묘사가 되어버린 눈물 시리즈

이하가 존경의 의미로 그린 초상화의 대표적 시리즈라고 할 수 있는 눈물 시리즈가 바로 그 대표적 시리즈이다. 눈물시리즈에서는 간디, 만델라, 마더 테레사와 같은 세계적 인물부터 시작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김근태 전 의원 등이 대상으로 등장한다. 눈물 시리즈 또한 같은 배경에 실존 인물들을 담아 시리즈로 묶었다는 점에서 독재자 시리즈와 같은 양상인데 결과물은 아주 대조적이다. 인물의 특징을 부각하기 위해 인물의 행적을 담을 수 있는 캐릭터를 찾아 인물의 공간감까지 조성했던 독재자 시리즈와는 달리 눈물 시리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말쑥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눈물 시리즈의 작품들은 거의 대부분의 작품이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그려졌는데 실제 사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사진과도 같은 초상 작품들이다. 팝 아트가 가진 강렬한 색채의 조화, 패러디가 가진 다양한 요소의 융합적 표현, 오마쥬가 가진 숭고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눈물시리즈는 소위 ‘민주화’나 ‘민중 지도자’의 타이틀을 단 유명인들의 눈물을 화두로 그들에 대한 ‘존경’을 핵심 삼았다는 점에서 독재자 시리즈보다 더 확고하고 짙은 의도를 보여준다. 그래서 아무런 설정을 이입하지 않은 것인데 오히려 의도를 확실하게 하고자 곁가지를 모두 쳐낸 이 그림들은 유명인의 사진을 변형하여 빠르게 한 장 만들어낸 느낌의 그림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그러므로 강렬한 의도가 이 작품들의 표현성을 더 흐릿하게 만들어 작가가 의도한 존경의 의미가 전도되었다는 것이 눈물 시리즈의 현 주소다.

 

가장 모호한 설정, 그러나 가장 강렬한 해석

목적과 의도의 갈림길에서 해방되어 충분한 매력을 발산한 작품이 등장하는 이하의 시리즈는 ‘스킨 시리즈’이다. 주로 여성의 몸을 소재로 한 스킨 시리즈는 성기만 겨우 가린 풍만한 여성의 몸을 그린 작품들이다. 인상적인 점은 피부의 색채가 전부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하얀 피부를 가진 여성에게 집중된 미에 대한 찬사를 거스르겠다는 모종의 메시지로 해석 가능한 부분이다. 그런데 스킨 시리즈는 특정한 인물의 특정한 행적이나 공간을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작가가 인종 문제나 하얀 피부 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에 작품 의도를 두지 않고 창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러한 지점에 대한 언급은 스킨 시리즈가 가진 엄연한 하나의 해석이 될 수 있다. 작가는 여성의 몸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고 그것은 특정 환경, 특정 역할을 맡은 여성이 아닌 몸 자체에 집중한 표현을 여과 없이 표현했다. 그렇기 때문에 스킨 시리즈는 눈물 시리즈나 독재자 시리즈에 비해 의도와 표현이 일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큰 상관이 없는 성향의 작품이다. 이런 경우 여성의 몸에 대한 대중의 다양한 기호가 해석 그 자체로 인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스킨 시리즈는 의도와 표현의 일치도가 가장 높은 시리즈라는 언급이 가능하다. 의도의 디테일을 걷어내니 눈물 시리즈와 독재자 시리즈가 빠진 아이러니에서 해방 된 스킨 시리즈가 주는 매력이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나여랑

 

웃음-비(非)웃음의 정치학

이하는 팝아트 형식을 빌어 정치인들의 케리커처를 그리고 이를 포스트나 전단지로 제작하여 공공장소에 부착하거나 건물의 옥상에서 살포한다. 작가가 취한 전략은 정치인들의 권위적이고 엄숙한 이미지를 귀엽고 샤방한 만화 케릭터와 중첩(더블링)시킴으로서 그들의 권위가 갖는 무게를 희석시키고 이를 공공장소에 유통시켜 대중의 다양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의 출발은 2009년 뉴욕에서 생활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공모전에 탈레반 병사의 이미지를 귀엽고 아기자기한 케릭터로 형상화시켜 수상한 이후, 2010년 오사마 빈 라덴 사살사건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폭압적이고 권위적인 인물들의 이미지들을 귀엽고 예쁜 이미지로 탈바꿈시킨 <독재자 연작>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부터 이하의 작업은 누구나 알 수 있는 대중적인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삼아 대중문화 속 케릭터 이미지를 중첩시킨 구체화된 양식으로 나타난다. 작가 자신도 고백하지만 이 시기의 작업들은 현재의 작업들보다는 ‘덜 정치적이다’.
이하의 작업이 본격적인 행동주의적 양식을 띄게 된 건 그가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이후부터이다. 이명박 정부 시기의 정치적 피로감과 서민들의 무기력감을 미술계 내부의 위계구조 안에서도 고스란히 느꼈던 경험과 미술작가로서 이에 대항할 최적의 형식을 고민한 끝에 보다 직설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게 된다. 그러나 이하의 작업은 단순히 개인의 정치적 발언의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개개의 시민들은 거리에 뿌려진 전단사진이나 이를 취재한 신문기사 등을 통해 작가의 작업을 직간접적으로 접하고 작가가 그린 케릭터들을 단순히 웃음코드로 다루며 온라인 상에서 재합성하거나 퍼나르기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소비하기 때문이다. 이하가 그린 무수한 케릭터들 중에서 머리에 꽃을 꽂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의 케릭터 아래로 Mad Goverment 라는 단어만 없었다면 이 풍자화가 반정부적 정서를 함의하고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친근하게 재현되어 있다.
네티즌들이 정치 권력자들의 이미지를 유쾌하고 장난스럽게 다루는 반면에 미술관과 국가 권력기관의 대응은 사뭇 진지하고 심지어 히스테릭하기까지 하다. 미술관 관계자들이 고위 관료들을 의식해 이하의 작품을 벽에서 떼 내거나 갤러리 관장이 전시 도중 창고에 자신의 작업을 숨겨놓는 일은 물론이고 2012년 전두환 초상화를 그린 이후에는 ‘불법 광고물 부착 혐의’, 벽의 소유권에 대한 ‘주거권 침해’ 등 각종 경범죄의 죄목으로 시시때때 사법기관에 불려 다니는 일은 일상이 된지 오래다. 이와 같은 하위 권력기관의 유난스런 반응들은 그들이 상징적 권력에 복무하고 있음을 제 스스로 폭로시킴과 동시에 상징권력이 갖는 뿌리 깊은 엄숙주의 문화를 보여준다.

풍자의 성역을 허무는 매체, 검열하는 권력들

우리 하등동물들은 수치와 모욕과 끊임없는 박해에 대항해, 마침내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인간들이 씌운 멍에를 벗어던지기로 결정했다. 압제자들은 그들이 창조된 이래로 자유와 평등을 단지 이름뿐인 껍데기로 만들었다.
– 「그랑빌 우화」 중에서
풍자화의 역사는 기원전 이집트의 단순히 지배층을 풍자하는 이미지들부터 거슬러 올라가겠지만 풍자화가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게 된 시기는 16세기 종교개혁 이후부터였다. 근대의 조짐이 시작되던 이 시기에 그림과 만화는 대부분 문맹들이었던 당시의 민중들을 향한 효율적인 프로파간다 수단으로 부상했다. 따라서 풍자작품들은 대중의 관심 사안을 대변하거나 판단을 촉구하는 도구이자 문화 주도자인 엘리트가 대중에게 팔기 위해 만든 생산품이며 때로는 설득, 선동하기 위해 또는 재미로 그려진 것일 수 있다.
시민 사회의 위선을 풍자한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 1697~1764)나 프랑스의 대표적인 사회 풍자화가 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ier, 1808~1879), 주로 정치적 인물들의 케리커처를 신랄하게 그린 제임스 길레이(James Gillray, 1756~1815), 정치적 결단에 대한 풍자화로 유명한 리처드 뉴턴((1777–1798) 등 풍자의 대상과 내용도 포괄적 연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풍자화가 본격적인 황금기를 이루게 된 것은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인쇄매체의 발달과 맞물려서다. 풍자화는 대중들을 대상으로 하였기에 주로 책의 삽화로서 대량 복제가 가능한 대중매체인 판화로 제작, 인쇄되었는데 18세기 말에는 뮌헨의 제네펠더가 소개한 석판과 영국의 토머스 뷔크에 의한 세로[斷面]목판이 발명되면서부터 인쇄공정이 간소화되었다. 이러한 기술의 발달은 인쇄부수의 효율적 증가를 불러와 정치적 공론장을 확대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풍자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자 국왕은 검열을 강화했고 만화가, 인쇄공, 작가들이 사형당하기도 했다.
과거의 판화가 소수의 문화 엘리트 집단인 작가, 인쇄공의 수공정에 의존해 제작되는 1대 다중방식의 대중매체였다면 오늘날 SNS는 다수의 대중이 다수의 또 다른 대중들에게 동시다발적 전송이 가능해 아마추어 대중들의 문화적 실천이 용이하다는 특징이 있다. 오리지널 작품은 포토샵, 플래시 같은 편집 프로그램의 발전으로 메타연성이 가능해졌다. 일단 한번 업로드하면 수 초 이내로 전세계의 대중들에게 전파되고 사라지는 타임라인의 무한한 스킨에서 이를 사전 검열하기란 불가능하며 흐름을 통제할 수도 없다.
원본을 제작한 이하 작가, 각종 메타버전들을 생산하는 각종 커뮤니티 활동가들, 좋아요를 눌러 동조를 구하는 네티즌들, 무한 공유하며 유통시키는 네티즌들, 이 모든 게시물들에 한마디 덧붙이는 댓글러들.. 이들 중 누구에게 정치적 혐의점을 씌워야 할 것인가. 작가 이하의 작품들이 미술계에서는 기득권에 저항하는 풍자회화로, 사법기관에서는 광고물부착 퍼포먼스 행위로, 온라인 커뮤니티의 네티즌들은 이미지 파일 등 담론장의 성격에 따라 각기 다른 매체로 전유되어 이해되는 일련의 상황들은 풍자의 웃음을 결정짓는 정치적인 사안을 구성하는 조건들과 검열을 비웃는 오늘날의 예술행동을 지탱하는 새로운 매체의 기능을 역설적으로 비추고 있다.

 

■이윤영

 

국가 폭력에 대항하는 무용성

작가 이하의 작업-히틀러 차림의 이명박 전 대통령, 개를 타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 등-은 공공장소에 걸리면 경찰이 출동하고, 전시장 안으로 들어오면 관장이 작업을 부분적으로 가리거나 아예 벽에서 내려버린다. 곧이어 기자들이 몰려들고, 작가는 검찰에 소환된다. 이러한 정치 풍자화를 그리거나 그것을 포스터 형식으로 제작해 일반인들에게 배포하는 이하의 작업은 작가에게 또는 작가의 포스터를 특정 장소에 부착한 일반인에게 법적 처벌 “朴대통령 풍자 포스터 금지장소에 부착 30대 입건” 아시아 투데이 김종길 기자, 2015. 5 26. 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40526010011695
이 내려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즉 작가는 그 가당찮은 ‘불법’ 행위에 부과된 벌금 10만 원을 수락하지 않고, 그것의 몇 십 배의 돈을 써가며 법과 권력에,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국가 폭력에 항거하고 있다.
이하는 2011년 <귀여운 독재자> 시리즈-북한의 김정일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정치인들을 만화 캐릭터로 묘사한 작업-를 시작으로 세월호 침몰과 같은 참혹한 현실 안에서 비탄하고, 부정부패를 일삼는 정치인들을 조소하는 등 작업을 통해 작가-주체의 정치적 투쟁을 보여준다. 이러한 작업들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파급되어 ‘현실’에 공감하고, 구조적 폭력에 맞서려는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가령 페이스북에서는 이하의 작업에 ‘응답’하기 위해 “자원봉사자”라는 ‘익명’의 이름으로 일반인들이 작가의 정치적 행보에 참여함으로써 궁극적인 주체를 출현시킨다. 즉 그들의 정치적 움직임은 작가의 작업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결국에는 개인의 자유 의지에 따라 발현되는 역동성인 것이다. 그러나 그 역동성은 국가 시스템에 의해 차단되며, 권력이나 특권을 부여받지 못한 개인에게 ‘건축물 불법 난입’, ‘쓰레기 무단투기’, ‘퇴거불응’이라는-‘예술의 자율성’을 존중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죄목을 씌운다. 요컨대 민주주의 안에서 정치란 국민의 사회적 분노와 감동을 표현하고, 갈등과 불화를 소통의 시작으로 삼으며, 개인과 사회의 형태를 끊임없이 만들어 나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국민의 사회적 발화행위에 대하여 검열 장치(법)를 들이대 그와 ‘다른’ 목소리는 소음으로 치부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국가 폭력에 맞서기 위해, 정당한 발언권을 행사하기 위해 스무 번 이상 파출소를 드나드는 이하의 작업은 한편으로는 국가 폭력에 대항하는 한 개인의 불굴의 의지로써 찬탄 받아 마땅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작과 동시에 결과가 뻔히 보이는 작업을 매번 새로운 듯 재개한다는 사실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는 처음에 검찰 조사, 구속, 항소와 같은 목숨을 건 “액티비티”를 염두에 두고 작업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작업에서 노골적으로 묘사되는 정치적 인물과 사건을 통해 작가의 정치색이 확연히 드러나다 보니 검찰 및 보수 언론에서 작가가 구현하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제도적 규범으로 제지하려 드는 것은 작가도 어느 정도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작가는 자신의 예술적/정치적 발화를 위해 국가의 압제를 운용하고 있는 듯하다. 무엇보다도 그의 정치적 행위가 ‘작업 배포-검찰 소환-항소’라는 일정한 패턴 안에서 재생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다시 말해, 작업 재개 후 수반되는 ‘법적 제재’는 작업에 반드시 포함되는 ‘필수항목’이 되었다.
하여, 본 글에서는 이하의 동어 반복적인 정치적 발화가 갖는 양가성, 그 ‘무용無用한 능력’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뻔한’ 관념(욕망)과 표현(언어)
앞서 서술했듯, 이하는 정치 풍자화/포스터를 제작하고 대량 복사해 언론사 앞이나 버스 정류장, 건물의 옥상이나 거리 한복판, 심지어 ‘접근 금지’라고 명시돼 있는 장소의 벽에 인쇄물을 부착한다. 그 수많은 벽 위로 수갑을 찬 채 29만 원 자기앞 수표를 쥐고 있는 전 대통령(전두환), G20 정상회의 공식 포스터 속 쥐(이명박), 박정희 얼굴이 찍힌 (독)사과를 들고 있는 백설공주(박근혜)<귀여운 독재자 시리즈>가 우스꽝스럽게 걸린다. 이를 본 지나가던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어떤 이는 작가를 격려하며, 더 ‘좋은’ 벽을 알려주기도 하고, 다른 이는 여기서 이러면 안 된다고 나무라며, 오히려 자기가 겁을 먹기도 한다. 이렇듯 작업은 자연스레 대중들의 관심을 유발하고, 감정을 표출하게 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작가/작업에 다가가 말을 건네는 그 순간부터 예술(정치)의 참여는 시작된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반응’은 작가의 ‘표현’ 안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귀여운 독재자 시리즈>는 백범 김구, 김근태, 노무현의 모습을 처연하게 담고 있는 <눈물 시리즈>와는 판이하다. 작가는 누가 봐도 ‘좌’ 측에 서 있는 사람으로서 보수정권을 비난하고, 진보정권에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다. 여기에서 그가 정치적 입장을 표방함에 있어 발생하는 결함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가 사용하는 이분법적 잣대는 현 정권의 행태를 고발하는 데도 좌익이 도모하려는 변화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데도 방해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작가는 <귀여운 독재자 시리즈>와 <눈물 시리즈>에서 자신이 지향하는 정치적 방향을 피력하기 위해 이미지의 극단적인 대비(이명박=히틀러, 노무현=체 게바라)를 사용하여 우익과 좌익을 명백히 구분 짓는다. 설사 각 연작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유사한 성격으로 묶인다 하더라도 그 두 그룹으로 분리된 인물들의 정치적 행위가 언제나 “옳은” 것과 “그른” 것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작업은 작가의 첨예하고 예외적인 정치적 관점을 드러내기보다 보편적 ‘대의’에 매달려 간다는 느낌을 준다. 사실, 작가가 이러한 정치적 작업을 계속하는 가장 큰 동인은 정부에 의해 방치되고, 은폐되어 늘 피해자의 위치를 점하는 개인과 집단의 목소리를 대신해야 한다는 예술가로서의 책무이다. 그리고 그 말 하고 싶은 바를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작가의 작업으로 하여금 (일시적인) 위안과 (일말의) 희망을 얻는 것이다.
이는 그의 작업이 쉽게 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바꿔 말하면, 이하의 작업은 여느 정치 풍자화와 다를 바 없는 특정 인물과 사건의 단면만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단일하고 명확한 작가의 정치적 입장이, 판단을 위한 거리가 확보될 수 없는 초근접 시선이 그의 정치적 “올바름”을 오염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현시점에서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뻔함’의 역능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하의 작업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 뻔하고 소모적인 여정 (포스터 제작 및 배포→검찰 소환→항소)을 몇 번이고 ‘반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그 정치적 퍼포먼스는 현실에서 어떠한 실질적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다. 그나마 변화라고 한다면 파출소에 들락거리는 횟수가 증가함에 따라 작가에게 부과되는 벌금의 종류가 다양해지는 것. 사정은 이하의 작업에 참여한 페이스북 “자원봉사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무권력의) 개인이 정치적 발화(현 정권에 대한 비판)를 할 때마다 빈곤하고, 피폐해져 가(야하)는 우리의 ‘현실’을 여실히 투영하고 있다.
이러한 ‘무한 도전’은 작가의 경우에는 완성된 그림(포스터) 바깥에서, 일반인 자원봉사자의 경우에는 자신의 주기적 일상 바깥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일면식도 없는, 사는 곳도 하는 일도 제각각인 사람들이 각자의 틀(권력에 의해 배정된 개인의 자리)을 넘어서 “말하는 존재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자기들에게 없는 시간을 가” 자크 랑시에르, 『문학의 정치』, 유재홍 옮김, 인간사랑, 2009, p.11.
짐으로써 창안하는 예술적/정치적 삶이라 할 수 있다. 그 예술적/정치적 삶이란 작가와 관람객의 구별,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경계가 무화되는 지점에서 ‘창의적 불화’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구체적인 형태는 바로 작가가 이름 붙인 “다단계 예술”이다. SNS를 통해 일반인 “자원봉사자”들이 만들어가는 그 예술은 오롯이 능동적인 의지와 의식만으로 (일시적인) 공동체를 이룬다. 그것은 “사회와 공동체의 관계를 재정립하”며, “익숙한 형태의 공동체도 체계적 형태의 사회도 아닌” 심보선, 「예술과 공동체」, 『그을린 예술』, 민음사, 2013, pp.75-77.
그 어디에도 포획되지 않는 관계를 생성해 낸다. 비록 이미-항상 실패를 전제하는 ‘무용한 역량’일지언정, 그것은 체계에 균열을 내고, 체계와 다른 목소리를 기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로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빛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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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peach, 인화지에 출력, 35x60cm, 2015

Impeach, 인화지에 출력, 35x60cm, 2015

▼pretty dictator series -pretty 전두환, mixed media, 160x120cm, 2012

Lee Ha, pretty dictator series -pretty 전두환, mixed media, 160x120cm, 2012

▼미친정부, 인화지에 출력, 2014

미친정부, 인화지에 출력, 2014

▼pretty dictator series -이명박, mixed media, 160x120cm, 2012

Lee Ha, pretty dictator series -이명박, mixed media, 160x120cm, 2012

▼The Tears Series-체 게바라, 35x60cm, mixed media, 2012

The Tears Series-체 게바라, 35x60cm, mixed media, 2012

▼animal series-elephant, mixed media, 60x120cm, 2014

animal series-elephant, mixed media, 60x120cm, 2014

▼The Tears Series-김대중, 35x60cm, mixed media, 2012

The Tears Series-김대중, 35x60cm, mixed media, 2012

▼The Tears Series-노무현, 35x60cm, mixed media, 2012

The Tears Series-노무현, 35x60cm, mixed media, 2012

▼140105 오늘의 그림일기

140105 오늘의 그림일기

▼131228 오늘의 그림일기

 

131228 오늘의 그림일기

▼150221 오늘의 그림일기

150221 오늘의 그림일기

▼150430 오늘의 그림일기

150430 오늘의 그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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