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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미 〈삶,형이상학적 얼룩〉 이종미 〈삶,형이상학적 얼룩〉

이종미 〈삶,형이상학적 얼룩〉

아트포럼리기획 ARTS & ITS FUTUREⅠ

이종미 Lee Jongmee

<삶,형이상학적 얼룩 >

아트포럼리 이종미

 

이종미의 ‘나’-無 시리즈 3부작 중 마지막인 ‘Eros, the song of a dead mother’는 빛과 소리, 자작 시 등이 어우러지는 설치작품으로, 3년 전에 돌아가신 작가의 어머니의 데드마스크를 중심으로 사랑의 이야기를 엮어나간다. 전시장에 가득 울려 퍼지는 독경소리와 아이의 말소리, 어머니의 목소리처럼 들려오는 소리들은 장르를 넘나들며 취해온 설치물들 간의 불연속적 간극을 이어주면서, 단순히 시각적 이미지를 넘어 총체적인 분위기 속으로 잠기게 한다. 여성과 아이의 목소리는 말과 음 사이를 넘나들며, 스님의 구음으로 진행되는 독경소리와 피아노 같은 단촐한 반주 음이 받혀준다. 엄마를 찾는 아이의 목소리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들려왔던 반야심경 읊는 소리의 공명은 삶과 죽음 사이에 걸쳐 있는 어머니의 사랑을 일깨운다. 어머니의 데드마스크는 삼원색의 빛이 중첩되어 생기는 하얀 공백 위에 배치된다. 가장 핵심적인 구성요소들이 교차되는 지역에서 빈 중심이 드러난다.
그것은 제로이자 무한인 지대이며, 주체성의 중심을 ‘無’로 간주해온 이종미의 ‘나’-無 시리즈의 정점을 이룬다. 그것은 부재와 결여 가운데서 더욱 강렬해지는 어머니와 사랑의 존재를 말한다. 3대의 빔 프로젝트를 통과한 여러 색상의 필름지나 다양한 근원을 가지는 음의 믹스는 시공간을 꼴라주하는 방식이며, 여러 구성요소들은 차이를 보존한 채 어우러진다. 이종미의 작품은 단일함이 아니라 다양성 간의 조화를, 독백이 아니라 대화를, 시각 중심주의가 아니라 다양한 감각의 향연인 공(共)감각을 추구한다. 작가는 가장 아름다운 가치인 사랑을 어머니라는 존재에게서 확인하며, 그 핵심에 타자에게 무한하게 사랑을 주고, 타자를 무한히 받아들이기 위해 텅 비워진 바탕을 설정한다. 그것은 이상적인 주체의 모습이며, 특히 예술가적 정체성과 밀접하다. 유년시절부터 어머니의 뜻에 잘 따랐다고 하며, 지금 누군가의 어머니이기도 한 작가는 이 작품 속에서 자신과 어머니라는 존재를 중첩시킨다.
이종미의 작품에서 모성애로 압축될 수 있는 숭고함은 지배적인 상징질서가 그렇게 하듯이 이항 대립 중 어느 하나의 항–대개 부정적이며 피지배적인 것으로 가치화 된–으로 환원된 것이 아니라, 동일자/타자, 중심/탈 중심 순수함/이질성의 경계를 위반함으로 통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경계자체를 의문시한다. 타자를 잉태하는 모성적 존재 자체가 주체와 타자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회 속에서 경계는 금기들로 설정되곤 한다. 또한 이종미의 작품에서는 순수함과 더러움을 나누는 금기의 경계를 통해서 순수함이 지켜지는 오염의 상징이 존재한다. 오염은 순수와 대조되는 부정적인 가치가 아니라, 경계를 위반함으로서 순수/오염의 이분법을 초월하는 또 다른 가치를 향한다. 비천함과 열락을 오고가는 불확정적인 그 가치가 초월코자 것은 가부장적 질서가 아로새겨진 상징질서의 이분법이다. 가령 그녀의 이전 작품에서 사용된 생리 혈이나 먼지 같은 소재는 경계를 넘나드는 질료로, 주체를 잔여물의 흔적들로 해체시킨다.
이번 전시에 나타나는 모성 역시 미술사에서 수없이 재현되어 왔던 성스러운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미술사를 가득 채우는 성스러운 모성의 이미지는 관념이 아닌 현실을 살아가는 여성들에게는 불편한 진실이어 왔다. 반면 이질성과 기괴함으로 가득한 이종미의 작품 속 모성은, 규범적인 기준에 비한다면 승화라기보다는 퇴행에 가까우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방식이 아니라 밑바닥의 진실부터 파헤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정신적 초월이 아니라, 지상의 삶을 주재해왔던 어머니라는 존재는 여성 뿐 아니라 인간 모두의 무의식에 깊이 각인되어 있지만, 의식 속에서는 잊혀진 대지였다. 아니, 의식의 중심을 차지하려는 이성의 욕망에 의해 잊혀져야만 했던 대지였다. 의식이 상투적인 코드화를 통해 애써 무화시키고자 하는 이 원초적 현실은 부정의 방식으로만 드러날 수 있다. 이종미가 선택한 방식은 없음을 확인하면서 충만을 도출하는 역설적 방식이다. 빛과 소리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그녀의 작품은 가변적이며 불안정한 경계들을 넘나든다. 주체를 이루고 있는 이질성들은 매순간 관계를 변경시킨다.
작품에 깔리는 음향은 명확한 표상의 언어로 형성되기 이전의 원초적 단계로, 언어적 주체가 생성되는 장소를 지시한다. 그것은 언어라는 상징계의 물질적 기질을 이루고 있는 현실을 예시한다. 작품 속 아이의 혀 짧은 소리는 명확한 음절이 형성되기 이전의 상태와 육체가 형성되는 시기를 예시한다. 또한 성인 여성의 목소리는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독경소리에 실려 출몰하는데, 그것은 반복과 죽음의 이미지를 중첩시킨다.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트라우마를 무화시키려는 반복강박에 실려 전달된다. 늘 과도하게 베풀어지는 어머니의 사랑은 죽음에 근접한다. 언어와 음악의 중간에 걸쳐 있는 다성성 속에서 어머니와 아이는 대화 한다. 그것은 아이가 어른이 되기 위해 어머니의 품을 떠나 사회적 언어를 획득한다는 정신분석학적 가설에 거슬러, 이미 원초적인 단계에서 어머니와의 대화가 이루어짐을 알려준다. 어머니라는 타자와 교환하는 전(前) 언어적 양식인 억양과 박자 속에서 이미 언어의 출발이 이루어진다.
작품 속 아이는 엄마라는 말 외에, 가지 말라는 말과 사랑이라는 단어를 어머니인 타자에게서 배운다. 목소리를 매개로한 타자의 현존은 언어 습득의 단계가 육체가 형성되는 단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 그래서 육체적 충동이 언어적 의미화와 밀접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크리스테바는 사회적 소통 수단인 상징의 단계 이전에 이미 언어활동이 태동한다고 본다. 어머니와 아이 간에 보내지는 육체적 신호가 언어의 출발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힘은 항상 상징계를 초과하며, 말을 단순히 의미하는 것을 넘어서 충동 및 행동과 연결시킨다. 그래서 언어적 존재인 인간의 정체성은 타자(대개 어머니)로부터 말을 배운다는 점 뿐 아니라, 태어나기 이전부터 주체의 자리를 선점하고 있는 사회적 언어로 소통해야 한다는 점에서 타자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의미와 충동이 공존하는 아이와 여성의 목소리는 사회적으로 규정된 상징적 질서 이전의 이질성을 대변한다.
그것은 곧 언어적 존재의 이질성을 드러내며 언어의 의미와 표상적 기능을 초과하는 요소이다.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언어는 결코 충동을 표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충동을 활성화시킨다. 특히 예술적인 언어가 그러하다. 충동은 이질적 물질의 운동인데, 이를 억압하지 않는다면 상징적 통일은 없다. 그러나 충동은 상징계의 통일에 도전장을 냄으로서, 그 통일체가 과정 속의 한 순간임을 밝힌다. 따라서 언어적 존재인 주체는 확고한 중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중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이종미의 작품에서, 의미가 전개되는 바탕인 시간성을 무화시키는 음향의 구성은 명확한 의미를 교란시킨다. 그것은 사회적 언어가 습득되기 이전 아이와 어머니 사이에서 이미 이루어지는 생(生)사회적 요소이다. 여기에서 대화는 무의미나 비의미가 아니라 의미를 생성하는 원초적인 힘이자, 상징질서의 경계를 위반하는 실험적 요소이다. 이러한 중간적 단계를 통해 무시무시한 정신분열이나 완전히 무정부주의적인 자연 상태, 그리고 상투적이고 공허한 말 모두를 지양한다. 이 단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크리스테바는 [사랑의 정신분석]에서 작품에서 표면적으로 존재하는 상징을 넘어서 그 조정을 위협하는 또 다른 운동성을 말한다. 기호계라고 명명된 이 단계는 상징으로 하여금 변하지 않을 수 없게끔 계속 작용하는 그 무엇이다. 예술은 상징계를 파열시킬 수 있는 열락의 흐름을 상징계 속에 허용한다. 예술로 향한 개방은 차이로 향한 개방이다. 크리스테바는 예술적 언어의 경우 상징적 정체성은 차이로 충만해 있으면서도, 언어로서의 완전성은 잃지 않는다고 본다. 언어의 이질성이 최대로 뚜렷해지는 곳은 예술적 언어에서이다. 예술적 언어는 언어가 아닌 언어이고, 언어 그 자체에 타자인 언어인 것이다. 의미는 있으나 의미화 하지 않는 요소인 음악적 요소는 예술에서 매우 중요하다. 예술 속에서 방출된 충동의 힘은 전통적이거나 지배적인 담론 및 표상을 바꾼다. 음으로 가득한 시공간을 연출하는 이종미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충동의 표상이 아니라 방출이다. 데드마스크가 상징하듯 표상은 죽음을 전제로 할 뿐이다. 그것은 표상을 떠받치는 통일성이나, 기표와 기의의 필연적 관계로 나타나기 보다는 기표와 기의가 어떻게 생산되는가를 보여준다.
물질적이고 생물적인 단계를 넘어선 언어, 즉 사회의 영역으로서의 상징계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엘렌 식수는 지배적 권력의 보유자인 상징계의 가부장적 성격을 강조한다. 상징계는 남성의 욕망을 현실인 것으로 이론화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사고에서 죽음과 성–그것은 또한 여성적 영역으로 간주된다–은 표상 불가능한 것이 된다. 표상 불가능한 것은 공포와 매혹의 동시적 원천이 되지만, 물신으로만 드러날 뿐이다. 반면 표상 이전의 충동의 언어는 죽음과 성까지도 포괄한다. 라깡의 주장대로, 무의식이 언어와 같은 구조로 되어있다면, 무의식은 항상 이질적이다. 그것은 열린 체계로서 법과 위반 사이를 왕래하며, 언제나 과정 중, 시험 중, 수정 중에 있다. 현대의 언어학은 하나의 기표에 하나의 기의가 대응하고, 기의가 없는 기표는 없으며, 양자의 결합에 의해 기호가 구성된다고 본다. 그러나 라깡에게 기표와 기의는 그처럼 일대일 대응을 이루지 않는다.
의미와 사물 사이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합치를 추구하는 끝없는 이동이 있을 뿐이다. 담론은 상상적인 요소와 놀이, 그리고 개방성이 펼쳐지는 터전이다. 욕망을 표상하는 대상은 기표이다. 그 대상을 포착하는 순간 욕망은 완전한 충만감을 못 느끼고 다른 대상을 열망한다. 라깡은 주체를 통일하는 특성을 오로지 기표와 욕망의 영역 내에 둔다. 그러나 크리스테바는 라깡의 기표와 욕망 뒤에 있는 모성과 충동에 더욱 주목한다. 켈리 올리버는 [크리스테바 읽기]에서 오직 기표와 욕망의 영역 내에서만 일어나는 라깡의 이상화와 동일화는 충동을 단절시킨다고 본다. 크리스테바는 욕망보다는 감정을 중시한다. 욕망은 결핍을 강조하는 반면, 감정affect은 결핍을 인정하면서도, 타자에로 향하는 운동과 상호유인attraction에 더 역점을 둔다. 크리스테바에게 1차 동일화는 결핍이라기보다는 타자를 향한 과잉, 즉 사랑이다.
크리스테바는 욕망에 대한 헤겔 식 개념이, 사회관계의 근거를 결핍과 투쟁에 두는 반면, 프로이트는 사랑(에로스와 동일화)에 둔다고 본다. 그녀는 금지와 억압에 근거하지 않는 윤리, 사회성이 쾌락과 폭력에 근거를 두는, 즉 향락의 억압보다는 향락 자체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고 본다. 여기에서 타자성은 고통스런 간격이라기보다는 즐길만한 과잉이 된다. 고통을 주는 것은 법의 위기가 아니라, 사랑의 결핍인 것이다. 법률적 모델은 법의 힘을 통해 상호관계를 가지는 독립된 주체를 상정한다. 그러나 크리스테바가 제안하는 모델은 법이나 의무가 이미 그 ‘주체’에 내재함에 따라 법 바깥/ 이전에 작용한다. 이 법은 육체 내에 있는 법이다. 타자와의 대화를 통해 언어의 생사회적 요소를 강조하는 이종미의 작품은 발굴되지 않는 주체의 측면인 모성을 드러낸다. 이질적인 타자를 품고 대화할 수 있는 모성의 역량은 여성적 몸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억압적 질서로부터 인간이 해방되는 데 있어 성의 차이를 강조하는 뤼스 이리가라이는 [차이의 문화를 위하여]에서 태반의 역할을 강조한다. 이 책에 인용된 바에 의하면 태반은 ‘어머니의 몸 덕분으로 성장하는 아이의 기관’(헬렌 로쉬)이다. 서로 구별되는 모체와 태아의 조직 사이에서 교환을 조정하는 것이 바로 태반이다. 이러한 태반의 존재는 면역학의 측면에서 태아를 모체에 기생하는 존재라고 보는 관점이나 모체와 완전한 하나로 보는 입장을 모두 거부한다. 그것은 타자와 직면한 동일자가 타자를 이물질로 완전히 배척하거나 타자를 동일화하는 두 가지 입장을 기각한다. 배척이나 융합이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는 질서 잡힌 구조로서의 태반은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이상적 모델을 제공한다. 아이는 성숙한 어른이 되기 위해, 즉 사회적 주체가 되기 위해 어머니와의 융합을 깨뜨려야 한다고 가정되었었다. 그러나 태반이라는 존재는 자아간의 구별이 언어 이전에 이미 존재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 원초적 관계는 이후에도 계속된다.
‘모체와 맺은 관계의 물질성은 사라지더라도, 언어는 모체로 만들어진 용법 안에서 고갈되지 않는 모태’(헬렌 로쉬)로 남기 때문이다. 뤼스 이리가라이는 자연의 질서에서 분리된 문화는 아이와 갖는 어머니의 관계가 가지는 윤리적인 성격을 무시하거나 인지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여성의 몸은 병이나 거부반응, 생체조직의 죽음을 유발시키지 않고 자기 안에 생명이 자라도록 관용하는 특수성을 지닌다. 불행히도 문화는 타자에 대해 존중하는 이 구조의 의미를 뒤바꾸어 놓았다. 문화는 모자 관계를 종교적 우상으로까지 맹목적으로 숭배하였으나 이 관계가 나타내는 자기 안에서 타자를 관용하는 모델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종미의 작품은 주체를 구성하지만 그자체로는 사유되지 않는 대타자인 어머니와의 관계를 환기시킴으로서, 주체와 예술이 회복해야할 어머니와의 태곳적 관계를 말한다.

■ 이선영(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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