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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 〈나의 길〉 선무 〈나의 길〉 선무 〈나의 길〉 선무 〈나의 길〉 선무 〈나의 길〉

선무 〈나의 길〉

 

 

나의길

■ 전시기간 : 2022. 07.04(월) 2022.07.30 (토) * 월-토 10:00-18:00 (일요일 휴관)

■ 장소 :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조마루로 105번길 8-73

■ 문의 : artforum.co.kr / artforumrhee@gmail.com T.82(0)32_666_5858

■ 주최 : 대안공간 아트포럼리

■ 후원:주)디포그, 네오룩, 남북통합문화센터, 남북하나재단

 

 

선무의 작품에 대해 묻고 선무가 말하다.

나는 선무(線無)다

붉은 바탕에 흰색으로 선명하게 적은 글씨 ‘나는 선무다’는 마치 수면 위에 세워놓은 간판의 구호처럼 단호하다. 분홍빛으로 물든 글씨 아래로는 글씨의 잔영이 비치고, 그 아래에서 올챙이와 같은 생명체가 글씨를 향해 외롭게 유영하고 있다. 강산에의 노래 <연어>의 가사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를 떠올리게 만들듯 가없이 넓은 수면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이 생명체는 어쩌면 선무 자신을 표상한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의 작품에는 무섭게 말려오는 큰 물결에도 아랑곳없이 헤엄치며 솟구치는 물고기들이 종종 나타나기도 한다. 주검이 떠내려가는 두만강의 차가운 물 속에 몸을 바짝 숨기고 국경을 건넌 그는 중국의 국경도시에서든 라오스에서든 생존을 위해 홀로 결단하고 결행해야 하는 순간과 마주쳐야만 했다. 핏빛보다 붉은 화면 위로 떠오른 ‘나는 선무다’란 글씨를 향해 힘겹지만 지칠 순간 없이 나아가고 있는 저 생명체에서 나는 선무의 놀라운 생존본능과 적응력을 본다. 

선무는 탈북작가이다. 1972년 황해도의 한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2001년 북한을 탈출한 그는 중국에서 몇 년을 신분 없이 살다 라오스와 태국을 거쳐 2002년 남쪽으로 왔다. 나는 2008년 부산비엔날레 개막식에서 처음으로 선무를 만났지만 아직 그의 진짜 이름을 모른다. 그냥 선무다. ‘선이 없다’는 가명은 이쪽과 저쪽의 경계에 서 있는 경계인으로서 그의 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당시 부산비엔날레에 그가 출품한 <김일성화(조선의 태양)>와 <조선의 태양>은 ‘국가보안법’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개막 전날 철거되었다. 그는 2008년 서울시 부암동의 대안공간 충정각에서 가진 첫 개인전에 북한 지도자 김정일이 인공기 아래에서 아마도 운집한 군중을 향해 오른손을 들고 있는 듯한 모습을 그린 <조선의 신>을 출품했는데 북한을 찬양하는 그림이란 주민의 신고로 경찰로부터 조사를 받기도 했다. 세습 권력이 지배하는 북한 체제를 탈출해 남한으로 왔고, 북한 지도자를 찬양하는 증거라곤 전혀 발견할 수 없으나 인공기와 김정일을 그렸기 때문에 주민으로부터 북한을 찬양하는 ‘불온한 작품’으로 지목된 것은 남한에서 여전히 분단의 장벽이 견고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부산비엔날레에 출품한 <조선의 태양> 역시 김일성 주석이 무표정하게 박수를 치는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이 두 사건은 풍자이든 재현이든 남한에서 북한 지도자를 그리는 행위 자체가 금기이자 자칫하면 처벌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만들었으나 그는 이후에도 줄기차게 북한 지도자를 그리고 있다. 아마 북한에서 이런 그림을 그렸다면 절대존엄에 대한 불경으로 처벌받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2014년 베이징의 한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중국 공안당국이 전시장을 폐쇄하고 작품을 압류하자 그는 쫓기는 신세가 돼 한국으로 돌아와 얼굴을 더욱 숨겨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전시의 무산 뒤에는 주중북한대사관의 강력한 항의가 작용했을 것이다.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그는 북한으로 추방되거나 강제송환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기도 했다. 훗날 그는 중국 공안당국이 압수해 창고에 보관 중이던 작품을 찾아 프레임에서 캔버스를 분리하여 캔버스만 미국으로 반출해 2019년 캘리포니아 컬버 시티에 있는 벤다냉전미술관(Wende Museum of the Cold War)에서 전시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와 작품을 미국에 알리는 기회를 가지기도 했다.

선무의 작업에 대해 ‘정치적 팝’으로 규정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의 작품의 모티브는 북한의 선전화와 이른바 ‘삐라’로 불리는 전단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북한에서 학교를 다닐 때 복도에 진열된 선전화를 일상처럼 봐왔고 대학에서 미술교육을 받았으며 군대에서도 선전화가로 활동했으므로 선전화의 구성방식이나 표현은 그에게 가장 익숙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형식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그가 홍익미대에 다니던 2006년부터인데 중국을 떠나 동남아 일대를 거치며 탈출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사실적인 그림과 함께 북한 주민을 선전화 형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북한 조선화의 형식으로 그린 풍경화와 정물화(화조화)도 있다.

어린이

선무가 선전화 방식으로 제작한 작품 중에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이 어린이를 주제로 한 것이다. 어린이를 주로 그리는 이유에 대해 작가는 “아이를 통해 우리들의 미래를 이야기하려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북한은 헌법 제72조에서 주민들이 무상으로 치료받을 권리, 노령·질병·노동능력 상실자, 무의탁 노인 및 보호자 없는 어린이가 물질적 지원을 받을 권리를 명시하고 있다. 이 사회보장제도에 따라 저소득층 근로여성을 위한 사회복지의 목적으로 취학전 아동을 위한 탁아소와 유치원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1976년에 채택된 ‘어린이 보육교양법’은 제1조에서 ‘어린이들은 조국의 미래이며 공산주의 건설의 후비대이며, 대를 이어 혁명할 우리 혁명위업의 계승자들’임을 명시하고 제2조에 ‘모든 어린이들을 탁아소와 유치원에서 국가와 사회의 부담으로 키운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의 취학전 아동교육은 어릴 때부터 공산주의 정치사상 교육을 통해 혁명일꾼을 육성하는 데 있다. 5세 이상 어린이들이 교육받는 유치원 강당에서 울긋불긋한 한복을 입은 아이들이 손에 조화(造花)를 들고 반주에 맞춰 노래와 율동을 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치원 과정을 마치고 소학교에 입학한 어린이 중에서 공부는 물론 솔선수범하여 모범이 될 뿐만 아니라 집안 성분도 좋은 어린이들은 시험을 거쳐 ‘조선소년단’에 입단한다. 흰색 윗옷에 어깨에 붉은색 목도리를 걸치거나 넥타이를 맨 어린이들이 바로 조선소년단원이다.

선무의 작품에서 사회주의 체제 아래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귀엽지만 다소 과장된 표정으로 ‘우리는 행복해요’, ‘우리는 모두 행복동이죠’라는 구호에 맞춰 밝게 웃거나 ‘세상에 부럼없어라’고 외치는 어린이들의 모습은 그가 북한에서 성장할 때 익숙하게 봤던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어린이들의 모습이 실제로 마냥 행복하기보다 북한 체제가 걸어놓은 최면에 빠져있다는 것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래서 한없이 행복한 그들의 모습에서 올더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표현한 디스토피아의 그림자를 볼 수도 있다. 헉슬리가 제목으로 따온 『템페스트』에서 세익스피어는 “인간은 참으로 아름다워라! 오 멋진 신세계”라고 노래했지만, 그 멋진 신세계는 ‘좋은(εὖ) 땅’이라기보다 ‘없는(οὐ) 땅(τόπος)’일 따름이다. 그렇지만 선무는 이 어린이를 통해 미래를 본다. 그들은 인공부화소에서 태어나 유전자에 따라 계급이 분류되고 소마(Soma)에 취해 세상 모든 고통이나 분노도 잊어버린 채 가짜 행복에 빠져있는 ‘멋진 신세계’의 거주자들이 아니라 분단의 경계를 넘어서 통일을 향해 뜀박질하는 희망을 표상한다.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으로 2017년에 제작한 <손에 손잡고>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똑같은 흰색 체육복을 입은 8명의 어린이들이 서로 손을 잡고 뛰어오는 모습을 포착한 것이다. 가슴에 베트남, 미국, 일본 한국, 북한, 중국, 러시아, 독일 국기를 이름표처럼 부착한 어린이들은 모두 한국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데 아래의 붉은 직사각형 속에는 ‘우리는 평화를 원해요’란 글씨가 표어처럼 등장한다. 엷은 푸른색의 배경 위로 마치 넓은 붓으로 그린 듯한 둥근 선은 이들의 연대를 상징하며 아이들의 발 아래에서 튀어오르는 물은 이들의 천진난만한 질주를 역동적으로 고조시킨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는 한반도를 둘러싼 강국이며, 베트남과 독일은 각각 분단을 겪은 나라인 만큼 ‘우리는 평화를 원해요’란 구호의 주체가 남북한만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체제선전용 그림의 방법을 차용해 각 체제의 경계가 해체된 평화로운 세상을 그리는 것, 그것은 북한에서 태어나 성장한 선무가 남한에서 남한과 북한을 향해 제안하는 평화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선무는 2022년 이 작품을 주제는 같지만 방식은 다르게 다시 제작했다. 2022년의 <손에 손잡고>에서 선무는 ‘손에 손잡고’란 글씨가 마치 햇살처럼 비치는 약속의 땅, 대립과 갈등이 사라지고 평화만 존재하는 지상낙원을 향해 7명의 어린이들이 손을 맞잡고 달려가는 뒷모습으로 그렸다. 글자에서 비치는 빛에 의해 어린이들의 윤곽선이 선명하게 부각하는 명암대비는 작품의 연극적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키는데 이들의 그림자 속에 ‘우리는 평화를 원해요’란 글자가 떠오른다. 너무 낙천적이기 때문에 실제 현실과는 동떨어진 점은 있으나 평화로 향한 선무의 강렬한 염원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평화·통일 / 남한·북한 / 북한·미국

문래동의 한 전시 개막일 뒤풀이에서 만난 선무는 자신의 개인전에서 발표할 대표작품이라며 <우리의 봄>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 작품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각각 하얀 인민복과 정장 차림으로 손에 진달래꽃을 든 채 나란히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선무 특유의 방법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남북의 정치지도자가 걷고 있는 바닥을 은은한 붉은색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그 색조가 두 사람의 얼굴로까지 연장돼 디지털 기법으로 제작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두 지도자를 감싸고 있는 푸른색의 배경에는 노무현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활짝 웃는 모습이 넓은 화면 속에 실루엣처럼 떠오른다. 이 작품은 분단과 전쟁으로 깊어진 갈등과 적대관계를 유지해온 두 체제 사이에 전개된 만남과 대화의 과정을 떠올리게 만든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남측 구역에 있는 ‘평화의 집’에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적인 제1차 남북정상회담(북한에서는 ‘북남수뇌상봉’이라 부른다)이 열렸다. 단독회담을 마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남북공동선언인 ‘판문점 선언’을 통해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개선 및 발전으로 공동 번영과 한반도의 자주적 재통일을 앞당기고, 군사적 긴장관계를 완화하여 전쟁 위험을 실질적으로 해소하며, 항구적이며 공고한 한반도 평화 체제를 구축할 것을 밝혔다. 그해 5월, 두 지도자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북측에 있는 ‘통일각’에서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는 한반도의 비핵화와 항구적인 평화 체제를 위한 상호협력을 거듭 확인하며 필요하면 언제든지 서로 통신하거나 만나 격의 없이 소통할 것을 약속했다. 9월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은 위원장과 만나 ‘평화, 새로운 미래’를 표어로 한 제3차 남북정상회담을 가졌다. 3차례에 걸친 이 만남은 2019년 2월과 6월에 열린 북미정상회담을 가능하게 만든 밑바탕이기도 했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3년에 이르는 열전과 공방전 끝에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으로 휴전선에서의 전투는 멈췄으나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후 지속된 냉전 구도 속에 남북한은 각자 체제 강화에 주력했다. 그런데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프라하의 봄’을 유혈 진압한 후 소비에트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가 “사회주의가 위험에 처했다고 판단되면 어느 사회주의 국가든 개입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브레즈네프 독트린’으로 알려진 이 선언이 발표된 이듬해인 1969년 미국 대통령 닉슨이 수렁에 빠진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의 유지에 따른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핵 공격 이외의 공격에 대해서는 당사국이 1차적 방위 책임을 진다’는 닉슨독트린을 발표하고 1971년에는 적대관계에 있던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했다. 동서 긴장 완화(Détente) 분위기 속에서도 냉전의 대결구조 아래 권력을 강화하던 남한과 북한은 1972년의 ‘7·4 남북 공동성명’으로 타결책을 찾고자 했다. 7·4 남북공동성명의 핵심은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3원칙이었다. 그러나 제3공화국의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박정희의 의도와 과도한 국방비를 줄이려면 주한미군의 철수가 절실했던 북한의 입장 차이는 결국 대화의 중단으로 이어져 남북의 대립과 갈등은 지속되었다. 그러다 1985년의 남북 이산가족 상봉에 이어 제5공화국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으로 남한은 사회주의 국가들과 수교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88서울올림픽도 작용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의 출범과 함께 대북포용정책(햇볕정책)을 추진하며 그해 11월부터 금강산관광도 시작했다. 2000년 평양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은 분단 이후 처음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가진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김대중에 이어 평화번영정책을 추진한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10월 판문점의 군사분계선인 ‘노란선을 넘어서’ 평양으로 갔다. 그리고 2018년 4월과 5월에 평화의 집과 판문각, 그리고 평양에서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이 다시 열렸다. 2019년 하노이의 제2차 북미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는 다시 교착국면으로 접어들었다.

2018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2019 제1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릴 즈음, 선무는 매향교회의 옛 예배당을 문화공간으로 재생한 매향리 스튜디오에서 ‘반갑습니다’란 제목의 개인전을 열었다. 이 전시의 핵심은 높이가 거의 3미터에 이르는 캔버스에 재현한 문재인, 김정일, 도널드 트럼프의 초상화였다. 세 정치지도자 모두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건조한 표정이지만 매향리가 지닌 역사적, 상징적 의미와 함께 남북한에 이어 북미 정상회담을 지켜봤을 선무가 어떤 생각으로 이 작품을 제작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비록 문재인 대통령은 퇴임했고, 북한은 여전히 미사일을 발사하고 핵무장을 강화하겠다고 발표하여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으나 <우리의 봄>은 여전히 미완인 남북화해와 협력에 대한 선무의 기대와 희망을 드러낸다. 그가 생각하는 평화통일의 기초는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한 남북관계의 회복과 함께 <바이든>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북미수교이다. 그림 속에서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성조기와 인공기가 결합된 넥타이를 매고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데 그 아래 붉은 사각형 속에 마치 바이든이 외치듯 천리마체로 “우리 함께 이룩하자”란 구호를 적어 놓았다. 내용이 명확하고 직설적이기 때문에 별다른 해석이 필요 없는 이 작품은 유화로 그렸을 뿐 북한의 평양 거리에 게시된 선전화와 다르지 않다. 이것이 선무 작품만이 지닌 특징이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을 정치적 선전·선동으로 한정하거나 규정하는 것은 편협하다. 그의 작품이 복잡한 상징과 알레고리를 거부하고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미지와 구호를 결합한 것일 뿐만 아니라 남한의 예술에서 기피하는 포스터와 같은 방법으로 제작한 점도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남북한이 처해 있는 현실의 정곡을 찌르고 있다. 이런 종류의 작품은, 어쩌면, 아방가르드와 키치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펼쳐지는 줄타기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선무에게 “당신 작품은 너무 구호적이지 않나?”라고 말한다면 그는 분명 이렇게 대꾸할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 선무다운 태도이다. 그가 한국이나 서구의 회화 규범을 충실하게 따른 작업을 한다면 그것은 이미 선무가 아니다. 여기에서 나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로서 선무다운 태도를 발견한다.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평가와 북미수교에 대해서는 남북한의 내부정세는 물론 남한과 미국, 중국·일본·러시아 등 한반도를 둘러싼 나라들의 입장, 특히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이 어떤 관점과 태도를 보여줄 것인지에 따라 다양한 해석과 전망을 제시할 수 있다. 순서로 보면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경제발전의 걸림돌인 주한미군의 철수도 관건이다. 주한미군의 철수를 위한 전제조건으로 북한은 핵 개발의 중단과 핵무기 폐기도 보장하여야 한다. 그래서 선무에게 “북미수교가 남북문제 해결과 평화통일을 위해 과연 정당하고 올바른 해결방안인가, 너무 낙관적이지 않은가?”라고 묻는다면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나는 북한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평화를 기반으로 한 통일을 고민할 수밖에 없고 이를 위해서도 북한과 미국의 수교는 필요하다고 믿는다.”

경계인

김대중 정부가 대북포용정책을 추진할 즈음을 전후하여 북한은 힘든 시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계속된 경제난으로 북한식 사회주의의 특징인 배급이 중단되자 북한 주민들의 기아와 사회적 이탈 문제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 시기 북한은 1938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만주로부터 압록강 연안의 국경지대까지 행군했던 항일 빨치산을 떠올리며 ‘고난의 행군 정신’을 강조했다. 이 시간은 선무의 삶과 겹쳐진다. 그는 십대 후기로부터 막 이십 대로 진입할 때 ‘고난의 행군’을 겪었다. 그가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넘은 것은 자유를 향한 탈출이 아니라 먹고사는 문제가 더 크게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에서 담뱃잎을 지고 나르는 노동자로 살 때도, 변경의 조직폭력배들과 함께 지낼 때도 그를 지탱시켜준 것은 생존본능이었다. 이러한 생존본능은 중국과 라오스 국경의 산골 마을이나 라오스의 감옥에서도 작동했기 때문에 그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남한으로 왔다. 그런 점에서 선무는 분단의 유산인 이산(Diaspora)의 한가운데 있다. 한반도에서 이산은 분단과 전쟁이 직접적인 원인이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해방으로부터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만주를 포함한 중국, 일본, 동남아에서 귀국하거나 월남한 사람들을 전재민(戰災民)이라 불렀는데 미군정은 38선 부근에 난민촌을 건설하고 이들이 남한에 정착할 때까지 별도로 수용했다. 전쟁은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난민으로 만들었고 임시수도 부산은 실향민이 도착할 수 있는 마지막 땅이었다. 분단의 고착으로 헤어진 이산가족이 영영 만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남북적십자회담을 통해 이산가족 만남을 위한 회담이 여러 차례 이루어졌고 마침내 1985년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을 통해 이산가족이 상봉할 수 있었다.

선무의 북한 이탈과 이산은 자발적이었다. 그러나 북한 주민이었던 선무가 중국에서 이름 없는 존재로 살다가 남한에 와서도 이름을 숨기고 사는 이유는 북한에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무의 이산 또한 분단이 만들어낸 상처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는 돌아가고 싶고, 돌아가야 할 고향과 가족이 있다. 그러므로 남북관계는 그에게 중요한 관심사이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남한에 정착하여 대학원을 졸업한 직후에 노무현 대통령이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10·4 남북정상회담’을 가졌다. ‘평화와 번영’을 주제로 한 이 ‘2007 남북정상회담’은 선무에게 고향에 계신 어머니와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여전히 반공사상과 냉전적 사고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남한사람에게 선무는 경계해야 할 존재였다. 그것은 이쪽도, 저쪽도 선택할 수 없는 경계인으로서 선무가 짊어져야 할 운명이었다.

경계인으로서 선무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 <Blue>와 <Red>다. 먼저 <Blue>는 푸른 바탕 위에 흰 글씨를 빼곡하게 적어놓은 작품이다. 북한의 청봉체를 선무식으로 응용했기 때문에 ‘선무체’라 이름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그의 독특한 서체로 쓴 단어는 ‘대한민국·광화문광장·청와대·대통령·자유민주주의·선거·유신독재·국가보안법·반공·자본주의·삼성·현대자동차·정규직·비정규직·표현의자유·국가공권력·헌법재판소·한미합동군사훈련·폭탄주·6·15공동성명·6자회담·금수저·흙수저’ 등 남한의 언론에 가장 많이 노출되는 용어이다. 이 작품 속의 글자는 마지막으로 ‘나의 소원은 통일’로 끝난다. 반면에 북한을 상징하는 붉은 바탕 위에 흰 글씨를 적어놓은 <Red>에는 ‘사회주의는 과학이다·주체사상·온 사회의 김일성-김정일주의화·우리 식대로 살아나가자·생산도 학습도 생활도 항일유격대 식으로·10대원칙·자력갱생 생활총화·세상에 부럼 없어라·선군정치·강성대국·3대혁명 붉은기·혁명의 성산 백두산·목란꽃·주체예술·조선은 하나다·결사옹위·조국해방전쟁·당이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 갈테면 가라 비겁한 자야·천리마운동·속도전’ 등 이제는 남한사람에게도 익숙한 단어와 구호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이 두 작품에는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는 식의 가치판단이 개입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선무의 삶을 구성하였거나 현재에도 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남북한의 현실에 대한 증언이다.

그렇지만 고향은 언젠가 돌아가야 할 땅이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해와 여명을 받으며 기지개를 켜는 구름 아래에 야트막하게 펼쳐지는 고향의 풍경을 그린 <고향의 려명>은 그에게는 잃어버린 낙원이나 다름없다. 실핏줄처럼 꼬불꼬불 연결된 길과 논밭들, 여명 속에서 희끄무레 정체를 드러내는 민가와 학교, 여러 시설물들은 그가 이 장소를 떠나왔던 그 시간에 정지되어 있으나 오늘도, 내일도 저 해는 뜰 것이다. 비록 이 작품이 그의 노스탤지어를 드러낸다고 하더라도 아침을 기다리듯 귀향을 기다리는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철조망이 그의 귀향을 가로막고 있다. 백자 항아리에 만개한 꽃이 소담하게 꽂혀있는 <살구꽃>은 고향의 봄을 생각하며 그렸으나 줄기 대신 그려 넣은 철조망이 화면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고’란 글자가 적힌(또는 그려진) 투명한 화병 속의 양귀비 역시 아름다움의 대명사이자 자극적인 만큼 위험하기도 한 꽃을 소재로 한 것인데 화려하고 농염한 꽃조차 물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할 경우 시들고 만다는 평범한 사실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시들어 꺾인 붉은 꽃송이의 줄기에서 돋아난 가시는 철조망과 연결된다. 그래서 작가는 <붉은 노을2>에서 이렇게 절규하듯 적었다. “달나라도 갈 수 있는데 남과 북은 서로 오고 갈 수 없다.” 철조망으로 상징되는 분단, 그것은 비단 155마일에 이르는 휴전선에 설치된 철책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분단과 전쟁, 이후의 냉전체제에서 내면화된 적개심은 철조망보다 더 위협적인 우리 내부의 철조망이다. 남북화해와 상호협력의 조건인 상호신뢰는 우리 내부의 분단선인 이 불신과 적개심의 철조망을 걷어내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것을 위해 선무는 앞으로도 낯설지만 익숙한 선전화 방식으로 평화의 이미지와 구호를 발산할 것이다.

최태만/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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