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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린 〈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 김하린 〈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 김하린 〈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 김하린 〈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 김하린 〈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 김하린 〈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

김하린 〈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

 

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

Nothing is Everything

■ 전시기간 : 2022. 06.09(목) 2022.06.30 (목) * 월-토 10:00-18:00 (일요일 휴관)

■ 장소 :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조마루로 105번길 8-73

■ 문의 : artforum.co.kr / artforumrhee@gmail.com T.82(0)32_666_5858

■ 주최 : 대안공간 아트포럼리

■ 후원: 아르코, 시각예술창작산실, 경기도, 경기문화재단

 

잉여와 중첩이 만든 ‘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 들의 풍경

 김하린은 임신과 출산 이후 여성의 신체와 여성성에 대한 한층 깊어진 관심, 그리고 아이를 키우는 육아의 일상에서 경험한 심리적 변화와 사유의 연결고리들을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아 왔다. 그는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모성에 대한 여성주의적 시각을 전개시킨다거나 사회적 관계의 문제와 인류학적 범주의 사유로 확장하면서 이를 작업의 서사로 구성해 왔다. 이러한 관심과 서사의 구성은 대안공간 아트포럼리에서 개최하는 전시 <아무 것도 아닌 모든 것>에서도 이어진다. 이번 전시에서는 특히 여성성에 대한 그의 관심이 타자의 문제와 주변적인 것에의 주목으로 더 나아간다는 점이 관찰된다. 그가 선보인 재료의 물성과 감각의 변화, 작업을 위한 수행적 행위와 반복의 효과는 연속적이면서도 변화하고 있는 김하린의 관심과 전개를 엿볼 수 있는 단초가 된다.

 전시명과 같은 제목의 설치 작업 <아무 것도 아닌 모든 것(Nothing is Everything)>(2022)은 작은 한지 조각들을 연결하여 큰 이불이나 커튼을 드리운 것처럼 전시장에 설치한 작업이다. 관객은 작업 사이로 걸음을 옮기며 다가설 수 있고 그 곁을 거닐 수 있다. 다소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그의 이전 작업들에 비해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의 공간을 선사한다. 과거의 작업을 보면, 예컨대 <모성의 공간(Maternal Space)>(2021)은 수많은 젖꼭지의 형상을 조밀하게 나열하였고, 다른 작업들에서는 여성의 몸 내부로 들어가 자궁, 혈관, 털 등 특정 부위와 부속물을 연상시키는 구체적인 형상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들은 그저 연약하고 부드러운 몸의 일부일수도 있지만 신체 기관과 분비물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킨다거나 형상을 반복하는 경우 불편하고 낯선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생명과 관계하는 가능성의 공간으로서의 신체와 낯설고 불편한 신체 이미지라는 상반된 감각을 통해 여성의 몸을 모순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던 그의 전작들이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그에 비해 이번 작업은 한지라는 재료가 주는 순한 물성과 부드럽고 폭신한 감각을 통해 보다 편안한 정서와 차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구체적인 형상이나 물질적 차원의 감각보다는 오히려 한지 조각들을 잇기 위한 바느질, 즉 꿰매는 행위의 반복과 그 흔적들에 더 시선이 간다. 김하린은 생명의 유지와 생활의 지속을 위한 일상의 과정들을 바느질 행위에 비유한다. 그에 의하면 엄마로서 아이를 쉼 없이 보살펴야 하고 사소한 것까지도 대신 해줘야 하는 일상이 바느질과 닮았다는 것이다. 촘촘한 바느질은 작은 조각들을 연결하기 위해 하나하나 굽어 볼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바늘땀과 실 자국을 만들어내면서 실제로 전시장에서 작업을 지탱하는 힘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인다. 

 꿰매기 작업에의 몰두는 작가가 감당해야 하는 현실의 육아와 끝없는 보살핌, 모성 주체가 아이와 맺는 증여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투영한다. 남성의 교환과 달리 여성의 교환을 증여의 관계로 보는 엘렌 식수(Hélène Cixous)의 논의는 작가에게 모성에 대한 사유를 전개시키는 실마리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식수는 여성성을 단일한 전형성의 논리로 귀속시킨 전통적인 시각을 비판하고, 부재나 결여가 아닌, 과잉, 잉여, 관대함 등을 통해 여성성에 대한 긍정의 의미에 도달할 것을 제시한다. 김하린은 자신이 속한 삶과 일상의 범주 속에서 아이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과 포용, 돌봄과 배려, 끝없는 환대의 마음이 솟아나는 것을 부정하지 않고, 또한 그것을 사회적으로 규정된 모성의 굴레와 등치시키지 않으면서, ‘과도하게 정성을 쏟아보기’라는 그의 표현대로 잉여의 가능성을 찾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잉여의 소비 방식과 증여라는 교환 방식은 그의 현실에서는 아이에게 쏟는 사랑과 돌봄의 연속으로, 그의 작업에서는 바느질을 꿰매는 행위의 무한한 반복으로 수렴된다. 

김하린은 그렇게 꿰매어 연결한 한지 조각 모음을 전시장의 천정으로부터 매달거나 기둥을 둘러싸는 방식으로 공간적 구성을 시도한다. 여기에서 매달기의 설치방법은 주의 깊게 살펴볼 만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우선 작가가 그동안 일상의 짬 시간과 틈새 공간을 활용해 꿰매기 작업을 하여 연결한 한지 조각 모음을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공간에 설치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이번 작업에서 매달기는 한지 조각들의 중첩과 축적을 보다 잘 드러낼 수 있는 설치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는 중력에 따른 힘의 질서와 체계에 근거한 구축 방식과는 차이를 갖는데, 이와 같은 구축 방식은 애초에 한지 조각 모음의 중첩과 축적과 교차를 보여 줄 수 있는 방식이 아니다.

 매달기의 설치 방식은 그의 전작 <내 피부같은 담요(Blanket like My Skin Dos-2018)>에서도 보여준 바 있는데 이와 비교해 볼까 한다. 이 작업에서도 매달기는 그저 관객의 눈높이에 맞게 진열하는 디스플레이의 차원은 아니다. 뿌리부터 가지까지 몰골을 고스란히 드러낸 나무는 그것의 온전한 존재를 드러내고 있지만 한편으로 흙 속에 묻혀 있어야 할 뿌리가 뽑혀져 있는 나무는 불안정한 상태, 그리고 모순과 긴장의 상태를 전달한다. 그와 달리 이번 전시의 매달린 작업은 한지 조각 모음의 중첩과 축적을 잘 드러내고 꿰매어진 연결의 상태에 따라 표면의 작고 미세한 굴곡의 효과를 만들어 낸다. 요컨대 전작에서 매달기가 ‘모순’의 풍경을 전달한다면 이번 작업에서의 매달기는 ‘중첩’의 진열을 가능하게 한다. 중첩의 공간은 관객이 움직이고 다가가면서 몸과 관계하는 감각의 공간으로서 존재들의 관계적 맞물림이 생성하는 미세한 변주들이 축적되고 그 리듬으로 채워진다.       

 김하린은 아무리 거대한 권력과 구조라 해도 작고 사소한 이야기, 그리고 작은 조각과 손길에 의해 성립된다는 것을 작업에 담고 싶다고 언급한 바 있다. 중첩은 작은 조각과 작은 이야기들이 모여 가시화될 수 있는 축적의 양태이며 이는 그가 구성한 공간에서 중첩과 축적의 펼쳐짐이 중요한 이유이다. 그의 이런 의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과 ‘모든 것’을 등치시킨 작품 제목 ‘아무 것도 아닌 모든 것’에 잘 나타난다. 잉여를 소모하는 다른 방식, 공간에 작용하는 다른 힘의 위계를 보여주는 축적의 방식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도, ‘아무 것도 아닌 모든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

 특정 제도나 체계 내에서 주변적인 것에 대한 주목은 김하린의 또 다른 작업에서도 볼 수 있다. <L’autre> 연작은 회화의 형태를 띠지만 캔버스 위의 그림에만 주목하는 보통의 페인팅 작품과 달리 캔버스의 옆면을 위해 구상한 작업이다. 김하린은 캔버스 위에 물감을 얹고 밑작업을 하듯 붓질을 하는데 물감이 옆면으로 넘쳐흐르면 그대로 두어 그 잉여의 흔적이 남도록 작업한다. 물감의 양과 점도에 따라 달라지는 예측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미지로 남겨진다. 그림의 옆면에 대한 주목은 그가 말하듯 타자와 주변에의 주목이면서 회화의 지지체에 대한 고찰을 통해 예술의 기존 제도에 문제를 제기하는 일종의 유희일 수 있다. 또한 이는 캔버스의 앞면과 옆면의 상호 관계 속에서 잉여와 소모의 개념에 관한 또 하나의 시도인 것이다. 

 김하린은 모성을 둘러싼 이데올로기나 여성에 대한 사회적 규정과는 거리를 둔, 자신이 경험한 모성에 대한 자기 발언과 기록을 담담하게 작업에 투영해 왔다. 이번 개인전 <아무 것도 아닌 모든 것>에서 그의 경험과 사유는 꿰매기와 매달기의 공간과 그것이 보여준 잉여의 소모와 중첩의 풍경을 통해 펼쳐진다. 잉여와 축적은 자본주의 체계에서는 하나의 논리와 하나의 방향성을 갖지만, 김하린이 상상하는 모성의 체계 내에서 잉여의 소모와 축적은 소유가 아닌 증여를 통해 다른 방향성을 포함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갖는다. 그의 작업에서 시도하는 잉여와 증여의 관계들이 불러내는 가변성과 불확실성의 리듬이 타자와 주변을 위한 차이를 생성시킬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열린 마음으로.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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