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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동철<Reverberation> 홍동철<Reverberation> 홍동철<Reverberation> 홍동철<Reverberation> 홍동철<Reverberation> 홍동철<Reverberation>

홍동철

홍동철Hong dong chul

대안공간 아트포럼리 기획 초대전
<Reverberation>
2013. 04. 30(Tue) -2013. 05. 19(Sun)
Opening Reception : 5. 11(Sat) 5:00PM


그림, 또 하나의 시작

그림을 그리는 것의 기원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가 하나 있다. 한 사람이 세상 만물을
잘 알 수 있다는 듯이 ‘박물지’란 이름으로 많은 것을 기록하여 책으로 남길 수 있었던
시기에 살았던 플리니우스가 전하는 전설이다. 장소는 그리스의 코린토스. 기약 없는
항해를 나서는 연인과 작별을 해야만 하는 한 아가씨가 촛불에 의해 벽에 드리워진
연인의 그림자를 숯으로 그린 것이 이미지 제작의 유래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실질적
그림의 기원이라 볼 수 있는 구석기 동굴벽화에서, 그려지는 대상이 낭만적인 연인이
아닌 현실적 식량이었다는 데 다른 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미지들을 만들어낸 마음의
상태는 어마어마한 시간을 건너서도 여전히 공유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사라지려하는 것, 지금 여기에 없는 것을 다시 존재하게 하려는 욕망, 그것은 그 때
하얀 벽에 선명한 선으로 채워지는 것이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화가의 선택은 어떤 것이 될 수 있을까?

너무나 많은 것들이 이미 행해졌다. 또 그들의 생각들이 학습의 형태로 주입되었다.
그 상태에서 너만의 것을 창조하라 강요하는 세상에 화가는 살고 있다. 그러나 많은
것이 머리로 이루어지지 몸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시대, 그래서 남들과 달라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지, 삶의 여러 증상들을 우리는 공유하고 있구나를 돌아보기 힘든 시대.
그러면서도 남들이 하는 것은 하고 살아야 하고 나 혼자 못 하고 있는 것을 못 견디는
모순적인 시대. 삶의 문제들이 돈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고 여기는 시대. 하지만 실제로는
그로 인해 더 많은 문제들이 생겨난 시대에 화가와 우리는 살고 있다.

홍동철의 시작은 여기 이 지점부터이다. 그의 그림의 시작은 화면위에 선을 그려나가는
것이 될 수 없었다. 선으로 공간을 가르고 형태를 그린다는 것은 용감한 선택의 행위이다.
욕망을 충족하려는 적극적인 행위인 것이다. 그는 거기서 물러나려 했다. 화면위에 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뾰족한 끝을 가진 원뿔이 화면을 실제적으로 파고 들어가게 했고
그 흔적들을 하나로 모으면서 그는 시작하게 되었다. 새로운 자신의 형상을 뚜렷이
드러내지 않으면서 파편화되고, 원래의 모습도 점점 깎여 잘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의
폐허와도 같은 작품은 그의 마음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다. 같은 시대를 사는 우리 마음의
형상화일 수도 있다.

그는 물러남 속에서 태어난 폐허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 폐허가 말을 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 것 같다. 자신의 물러남이 새로운 드러냄을 부르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강력한 힘을 가진 둥근 원들을 그리게 되었나 보다. 원들. 과녁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수없는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는 그런 사물로서의 숙명 같은 것이 연상된다. 하지만
원 그 자체로만 보자면 이제까지의 폐허 이미지와 대비될 수 있다. 네모의 공간속에 가득
찬 원은 스러지고 깎여져 사라지려고 하는 것과는 정반대 극점의 형상이라고 볼 수 있다.
너무 강한 힘은 움직임을 허락하지 않는다. 변화를 허락하지 않는다. 아무리 없애려고
해도 오히려 더 생생히 도드라지는 것이다.

그에게 말을 거는 목소리는 움직일 수 없음을 원한 게 아니었나 보다. 그는 이제 원들을
겹치고 흐르게 만들었다. 하지만 흐름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만들진 않았다. 누군가가
걸어가며 그림을 보게 될 때, 그들에게 주어진 빛과 공간 속에서 그림의 선들이 드러나게
만들었다. 조용하게 말 거는 사람과 같이.

사실 이 화가는 조용하게 말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목소리도 크고 무언가를 강하게
표현하고 싶어 하는, 그러나 이제 그 표현의 방법을 찾고 있는 그런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하나의 중심만을 가지는 원과도 같은 강함을 닮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는 조금씩 그려지고 있는 자신의 그림들이 낯설다고 한다. 그래도 하나씩 그려 갈 때 마다
변화되고 있는 목소리들에 귀 기울이며 일렁임들을 받아들인다. 내가 본 마지막 그림은
일렁임이 격한 움직임이 되어 그림 속에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시작될  때 선택할 수 없었던
선들이 이제는 주저함 없이 마구 달려 나간다. 그는 그 앞에서 다시 물러남을 고민하고
드러냄의 형식을 선택한다. 그에게 드러냄은 물러남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는 것이기에.
그는 미리 결정지울 수 없는 막막함 속에서 조금씩 헤쳐 나가고 있다.

코린토스의 아가씨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연인의 사라짐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것은 사라졌음을 알고는 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는 상태이다.
그 아가씨는 연인의 모습을 그리는 것으로 고통을 달랠 수 있었겠지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대용물을 만들 수조차 없는 것 아닐까. 홍동철은 그 지점을 보는
것으로 시작하여 자신이 찾고자 하는 것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모습으로 드러낸다.

부재하는 것을 다시 존재하게 하려고 하는 마음을 이전에는 욕망이라고 썼다. 그런데 이
형체를 알 수 없는 부재감에 형태를 부여하고 자꾸 나아가게 하는 마음을 욕망이라고 쓸
수는 없을 것 같다. 그것은 욕망과는 조금 다른 어떤 것, 그리움이지 않을까. 욕망의 대상은
형태가 분명하다. 그러나 그리움의 대상은 막연한 것, 형태지울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리움을 느끼게 될 때 화가의 붓은 앞으로 나아가게 되고 막연함을 받아들이게 된다.
기약 없는 항해에 기꺼이 몸을 맡기게 되는 것이다.

글 박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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