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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미 <일상다반사> 이상미 <일상다반사> 이상미 <일상다반사> 이상미 <일상다반사> 이상미 <일상다반사> 이상미 <일상다반사>

이상미 <일상다반사>

이상미 Lee Sang Mi

<일상다반사>

2015.04.23(Thu)-05.14(Fri)

Placebo1(내일을 위한 드로잉)_인조손톱, 아크릴물감_2015

의심받기 시작한 일상의 균열

이상미 작가의 <일상다반사전>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특별할 것 없고 반복되는 일상에서 몇 가지 표본, 머리카락, 티백의 차가루, 립스틱, 우산, 알약과 같은 일상적 오브제들을 설치하여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듯이 전시공간 안에 집중하여 보여준다. 작가는 <티타임-모든 일에 대한 고찰>과 <내일을 위한 드로잉 Placebo> 설치작업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 늘 마시는 차, 카메라 앞에서 반사적으로 짓는 미소, 여성들이 외출 전에 립스틱을 바르는 행위들에 대해 ‘왜?’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식탁에서, 화장대에서, 까페에서 모든 것이 길들여져 너무나 자연스럽게만 느껴지는 개인들의 일상이 강요된, 짜여진 관계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는 의문 말이다.

개인이 현실 속에서 일상을 대하는 반응은 개인적인 소비로 드러나곤 한다. 약간의 정도 차이가 있을 뿐 소극적으로 SNS에 몇 줄의 소회를 남기거나 ‘좋아요’를 클릭하고 그것을 공유하는 정도라 할 수 있다.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수위를 유지하며 드러내는 반응들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갖을 수 있을까 냉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의심받기 시작한 일상의 균열은 일상생활의 상호 작용 속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아내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힘으로 전환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사고의 과정은 작가가 오랜 기간 프랑스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들여다 본 내부의 허약함, 불안과 같은 심적 현상에 대한 구조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어 보인다.

<…나는 자주 손톱을 물어뜯는다. 매번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또 손이 입에 들어가 있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왜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는지에 대해, 또 우리가 왜 버릇이라는 것이 생기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물론 이런 행동이 내가 처한 상황을 근본적으로 고쳐주지는 못한다. 내가 손톱을 물어뜯는 그 순간에는 조금은 불안감이 가시지만, 그건 그때뿐이다.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상황 자체에는 변함이 없으며, 이 상황은 곧 나에게 또 다른 불안을 안겨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슬프게도 쉽사리 변하거나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의 버릇은 우리의 암울한 현실에 대한 무의식적인 가짜 약(플라시보)에 불과한 것이다.>-작가노트 중에서

 

자기를 분석한 결과, 스스로가 자각한 문제가 결코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맥락으로 확장시켜 얼마간의 진단도 한다. 불안감에서 비롯한 행동은 무의식적인 가짜 약(플라시보)에 불과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적응과 불협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방어기재로 나타나는 버릇을 의문하며 이 과정은 작업의 동기로 작동한다. 작가에게 여전히 불안은 남아있지만 컨템포러리 아티스트의 존재방식으로 작품을 제작하고 몰두함으로써 오히려 그 불안은 일상을 꼬집어 가치를 찾아가게 만드는 힘이 되었다.

 

일상에서 시작한 의문들이 젊은 예술가가 자위하는 작업 소재로 멈추지 않고 이면과 모순을 안고 있는 무형의 권력에 대한 대항의 행위로 성장해 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예술이 나아갈 방향이고 작가가 작가로 존재할 수 있는 근거라고 생각한다.

■대안공간아트포럼리 큐레이터 이주연

 

「이상미 작가론」
붉은 디오니소스의 목소리로 노래하라

 

인간이 느끼는 감정들은 각각 개별적 의미를 갖는다. 의미론적 측면에서도 기쁨, 슬픔, 즐거움, 괴로움과 같은 보편감정들은 우리에게 일상적이고 당연하게 인식되는 것처럼 보인다. 데카르트(Rene Descartes)를 비롯한 근대 사상가들이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던 마음에 대한 직관적 인식은 ‘마음을 느끼는 내가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관점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하나의 중요한 점을 간과한다. 과연 마음 상태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나의 마음과 타자의 마음이 과연 동일한 것인지에 대한 이른바 ‘다른 마음의 문제(the Problem of Other Minds)’는 예술가와 관객의 관계맺음에서 그 특징을 여실히 드러낸다. 예술가가 이미지와 표현 방식으로서 부여하는 자기감정에 대한 의미는 관객의 자기감정과 완전하게 동일한 의미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예술가는 여전히 자기감정을 담은 의미의 이미지를 드러내고, 왜 관객은 이를 통해 작가의 의미와 감정을 공감하고자 하는 것일까?

 

  공간과 기억의 결합

작가에게 있어 사적 감정을 드러내는 내밀한 과정은 실존의 장치들을 필요로 한다. 이상미에게 있어 장치는 공간과 기억이다. 그는 공간과 기억에 감정과 행위라는 요소를 결합시킨다. 자기경험이라는 물질적 요소에 형이상학적인 의미소를 부여하는 그의 작업은 특정한 방식을 통해 이 요소들이 결합하기를 요구한다.
이상미의 공간은 물리적 공간에서의 경험이라는 단순한 범주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에게 있어 공간은 장소 특정적이면서도 관념적이며 문화적인 특징을 갖는다. 생활 속의 자신이란 특정 공간과 작가로서의 자신 사이의 관계성을 통해 정의된다. 이른바 ‘이상미’를 정의할 수 있는 모든 명칭들이 갖는 의미는 공간과 작가의 관계에 의해 부여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관계와 의미의 집합들이 자신의 감정과 결합하여 산출될 수 있는 모든 실존의 경우의 수를 작업을 통해 보여준다. 사회와 생활 속에서 느껴지는 순간의 자신, 의식하는 자신, 특정 시점 혹은 사건으로부터 벗어나거나 회귀하고자 하는 자신이라는 자기본질에 대한 의식은 공간성과 그 당시 감정이 결합된 이미지로서 재인식되고 표현된다(무제/설치_2011).
그의 기억은 시간의 연장에서 개별화된다. 기억은 마치 모나드(Monad)처럼 각각의 시간으로 구별되고 개체화된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기억은 그 기억으로부터 연상되는 감정과 결합하여 행위라는 전환점을 거친다. 이 때 행위란 이상미가 공간, 기억, 감정의 결합으로부터 생성되는 허무와 우울함의 실존적 자각을 벗어나고자 하는 주술과도 같다. 이는 일종의 버릇이라는 반복적 행위로서 나타난다. 다소 강박적으로 느껴지는 다양한 버릇은 견디기 힘든 감정으로부터의 도피와 방관의 한 축이며, 더 나아가 무의미적 의식을 통한 초월의 시도다. 그러나 이 때 도피와 방관은 그 자체로 끝맺음이 아니다. 일종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적극적 시도는 결국 스스로의 고통을 더 명확하게 마주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고 고통과의 마주봄은 곧 해소를 위한 시도로 이어진다. 그에게 버릇은 놀이이며, 해소라는 심리적 치유 행위이다. 버릇이라는 행위 중간 플랫폼은 기존의 공간과 기억, 감정을 예술의 한 형태로 변환시키는 중요한 지점으로서 역할을 한다. 작가의 자기기억은 실존의 장치들과 행위적 전환을 통해 미적 기억과 장치로 나타난다(무제_2011-2012). 이로써 이상미의 작업은 이 과정을 오롯이 담은 이미지의 결과물로 볼 수 있다.

 

  F(x), 가변의 프레임

이상미의 시공간은 재현에 필요한 내용과 도구이자 동시에 새로운 경험 의미를 받아들이는 하나의 틀이다. 그는 칸트(Immanuel Kant)적인 시공간 개념을 충실하게 따라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기 스스로 가진 시간과 공간의 틀을 감정과 행위와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자기 인식의 방법론으로서 활용하는 것이다. 그는 외부 세계의 일정한 선상에 자신을 가져다 두고 특정한 사회 안에서 설정되는 자기 정체성을 들여다본다. 객관적 시각을 바탕으로 하는 정체성의 규정과 내재적 자기인식의 결합은 ‘이상미’라는 고유의 작업 프레임을 형성한다. 그는 이 프레임을 활용하여 자기실존을 그 자체로 작업 전환의 과정으로 활용한다. 즉, 작가 자신이 작업이라는 수식이자 변수 값으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다소 직접적인 작가 정체성의 작업적 참여는 결과물의 개인성 혹은 개별성을 부각시킨다. 이 때 제기될 수 있는 물음은 다소 단순한 것인데, 그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가 관객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회의다. 그리고 나는 이 물음에 대하여 두 가지 측면에서 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역시 이상미가 취하는 놀이와 버릇이라는 행위 개념과 방식에 있다. 그는 진지한 실존적, 인식적 고민을 유쾌하고 익살스러운 방법으로 풀어내고자 한다. 젠가를 쌓듯이 약의 탑을 쌓거나(불면증_2010), 손톱을 물어뜯는 행위를 통해 남은 손톱들을 기하학적으로 배치하는 것(플라시보-내일을 위한 드로잉_2015), 혹은 뿔을 설치하고 이를 부수는 행위(유니콘과 나무꾼_2009) 등은 얼핏 다소 장난스럽게 다가온다. 행위 자체만 놓고 본다면 이는 단일한 행위 패턴으로 단순하게 설명될 수 있으며, 우습고 비생산적인 것으로 읽힐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러한 외부 재현의 시각적 결과는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와 감정적 무거움의 진지함 때문에 상호 역설된다. 재현방식과 의미의 공약불가능성이 오히려 서로를 반어적으로 강조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희극 속에서 느껴지는 비극이 주는 씁쓸함과 허탈함은 개인이 일상에서 겪는 모순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개인의 경험으로부터 도출되는 일상적 사건들은 이상미의 놀이와 일정한 연장선에 있다. 이는 그의 개인적 경험이 관객의 경험에게로 접근하는 내밀하고 긴밀한 공감이 된다.
또 다른 하나는 사적 경험과 공적 경험의 관계성에 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그의 사적 경험은 사회 속 인간으로서의 작가라는 주체적 프레임을 통과한다. 이 주체성의 상징적 프레임은 사적 경험이 공적 경험으로 읽힐 수 있는 맥락의 전환에 주요한 역할을 한다. 노클린(Linda Nochlin)은 인간의 사적 경험이 사회 안에서 실질적으로 어떻게 기능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집중했다. 노클린은 인간을 개별적 개인 그 자체로 바라보기보다는 사회 안에서 존재하는 조직의 하나의 유기체로서 간주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노클린에게 인간은 사회의 한 부분이며 개인의 삶과 사상은 그 자체로 하나의 공적 패러다임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생각은 이상미의 작업이 단순한 개인 경험의 재현에 머무르지 않음을 시사한다. 그가 여전히 긴밀한 공적 자아에 주목하는 한 그의 사적 경험은 예술적 작업을 통해 실패 없이 공적 경험으로 전환될 수 있으며, 그 자체로 언제나 인간 경험의 일반성을 획득할 수 있다. 이 때 확보된 경험의 일반성은 관객 공감의 주요한 기반으로 작동하며, 더 나아가 이상미 작업의 예술적 정당성과도 맞닿는 지점을 찾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고통의 이름으로 노래하라

니체(Friedrich Nietzsche)에 따르면 어떤 예술가는 예술을 통하여 자신의 본질 그 자체를 즐기려 하고 어떤 예술가는 예술의 도움을 빌어 잠시 동안 자신의 본질을 꺼내놓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려 한다. 인간이라면 필연적으로 직면하는 실존의 고통을 대하는 두 가지 대응 모두 예술가가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술가로서의 이상미는 이 두 가지 모습을 모두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가진 멜랑콜리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면서도 그 자연스러운 감정을 당당하게 마주하고 즐기고자 한다. 특히 그가 보여주는 다소 결핍되어 있지만 여성적이며 진보적인 상징들은 니체의 맥락에서 디오니소스적 속성에 그 주안점을 두는 듯 보인다. 나는 그의 작업에서 다소 허무주의적이지만, 특정 가상성을 통해(noir,깊은밤_2015) 무기력함을 초월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를 확인한다(Echanger_2010). 그의 작업은 끊임없는 자기회의를 통해 본질을 탐색해나가는 의지적 태도를 보여준다. 다소 자기애적인 작업의 특징들은 드러나는 결핍과 연약함을 유연하게 수용하며 스스로 가진 추함을 감화하여 새로운 미를 창조한다.
이상미의 작업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지점은 일종의 초월적 의지가 자기성찰에만 한정지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이 찾은 의미들을 통해 끊임없이 타인과 공감하고 소통하고자 한다. 이러한 자기해체의 시도는 그 자체로 남아있지 않고 복구되려 애쓰며(복원된 사진_2010), 복구되고도 여전히 인식되는 자신의 불완전성을 있는 그대로 타자와 나누려 한다(티타임_2011/ 아날로그식 소통_2009). 특히 이상미는 이러한 타자와의 관계맺음을 일상을 통해 확인하고자 한다. 생활의 주변으로부터 자신의 초월적 의지를 오브제를 통해 ‘찾아’낸다(티타임:모든일에 대한 고찰_2015). 이 때 일련의 일상 사건들은 그 자체로 작업의 과정이자 대상이 된다. 사소함으로부터 발견되는 오브제들이 갖는 미완의 본질은 결코 부정되지 않는다. 그는 경험되는 모든 현상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이를 타자가 가진 결함들과 동일 선상에 두고서 인간 경향의 일반 맥락을 읽어내고자 시도한다. 이러한 시도의 결과는 타자와 자신의 동일한 자기본질의 발견으로 귀결된다.

 

  자화상을 만드는 일

자신의 이야기를 내보이는 것이 어떠한 미학적 의의가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는 자전적 작가들에게 자주 제기되어 온 비판이었다. 이에 대하여 다소 성급하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상미의 작업이 이러한 의문을 일정 해소하는 본보기적 사례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라 옹호한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그의 작업에 해당하는 이야기이자, 자전적 작업을 시도하는 모든 예술가들이 함께 염두 할 일이다.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지점 중 하나는 자기 스스로를 당당하게 마주하는 것이다. 이상미의 이른바 자전적 작업에 대한 판단은 자신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는 표현에 집중하기 이전에 자기 직면의 전제적 과정에 집중되어 고려되어야 한다. 불완전한 자신을 바라보고자 하는 고민, 그리고 그 스스로의 불완전성을 타자에게 여실히 드러내고자 하는 용기가 작업 과정에서 온전하게 전제된다. 자기 자신을 마주보는 일은 인간이 인간다움의 속성을 획득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그는 이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다양한 고통과 우울을 감내한다. 고통과 우울로부터의 산물은 이상미의 자기성찰에 있어 필연적으로 생성되는 실존적 고민과 허무함이다. 관객은 주변부의 일상에서 자아성찰 경험의 기회를 갖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예술가는 이러한 경험을 자발적으로 시도하고, 그 경험치를 관객에게 보여준다. 이 때 관객은 예술가의 용기에 열광한다. 그들은 예술가의 경험에 공감하여 자신의 경험을 대체하거나 새로운 기회의 지점으로 삼는다(여행자의 기념비_2011/ 스트라부르크의 기념비_2011). 이와 같은 맥락에서 그의 작업은 개인의 이야기로만 국한되어 치부되지 않는다. 이상미의 작업이 이상과 같은 미적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한, 여전히 자전적이고 내밀한 자기 주제를 다루더라도 그 자체로 미학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루이스 멈퍼드(Lewis Mumford)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장 중요한 행위 중 하나가 예술이라고 했다. 예술은 상징화와 자기표현을 통해 인간이 주관을 가지고 자신을 드러내는 주도적 활동이다. 우리는 가끔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난해함과 몰이해를 동반하는 것이 양질의 예술이라고 착각한다. 이를 온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정의의 반대가 곧 예술성의 부족으로 이해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주관을 가지고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이는 한 여전히 예술은 한 없이 인간적이다.

■천미림

 

Placebo1(내일을 위한 드로잉)_인조손톱_2015 Placebo1(내일을 위한 드로잉)_인조눈썹_2015 2.Placebo1(내일을 위한 드로잉)_가변설치, 캔버스, 인조눈썹, 인조손톱, 머리카락, 공캡슐, 두통약, 커피가루, 젯소, 아크릴물감, 페인트_201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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