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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인 〈알던 것 분의 알 것〉 순수인 〈알던 것 분의 알 것〉 순수인 〈알던 것 분의 알 것〉 순수인 〈알던 것 분의 알 것〉 순수인 〈알던 것 분의 알 것〉 순수인 〈알던 것 분의 알 것〉

순수인 〈알던 것 분의 알 것〉

 

 

■ 전    시    명 : 알던 것 분의 알 것 

■ 작    가    명 : 순수인(노혜인,박경수)

■ 전 시 기 간 : 2020. 11. 09. (월) – 11. 28. (토)

■ 장            소 : 대안공간 아트포럼리

■ 문            의 : artforum.co.kr / T.032_666_5858

■ 기            획 : 대안공간 아트포럼리

■ 아트디렉터 : 이훈희

■ 큐 레 이 터 : 조은영,유상아

■ 전 시 서 문 

 

 

순수인의 유쾌한 반란 – 창조의 놀이를 시작하다.

 

아트포럼리 큐레이터 조은영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2~5세 어린이 중에서는 98%가 창의력 천재로 분류되는 반면, 25세 이상의 어른 가운데서는 단 2%만이 천재성을 유지한다. 상상력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의 눈으로 끊임없이 의문을 던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일례로 피카소는 “모든 아이는 예술가이다. 문제는 어른이 된 후에도 그 예술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라며, 몸집이 커질수록 창조성을 상실해 가는 현상에 대해 심회를 토로한 바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인간은 새로운 것을 만드는 창조의 힘을 점차 잃게 되는 것인가? 생철학 (生哲學)의 대가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무기력에 학습된 자들을 위해 다음과 같은 처방전을 내민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아이로 성장한다. ‘낙타’의 단계란 사회가 제시한 규범과 가치에 복종하며 인생의 사막을 걸어가는 것이다. 이윽고 우리의 정신은 ‘사자’가 되는데, 이 단계에서 인간은 기존의 프레임을 부정하고 자유를 포효한다. 그러나 사자의 단계는 파괴로 시작되어 허무로 끝날 뿐이다. 니체는 이 단계를 초극하여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새로 출발할 때에야 비로소 창조의 놀이를 시작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그리고 이번 11월, ‘순수인’이 대안공간 아트포럼리에서 선보이는 작업들은 “어린아이는 순수이고 망각이며, 새로운 출발, 놀이”라고 했던 니체의 바로 그 표현을 상기시킨다.

 

‘순수인’은 노혜인과 박경수 두 작가로 구성된 예술가 그룹이다. 대학 선후배 사이로 회화를 위주로 작업하던 이들은 작가로서의 공통된 목표 의식을 가지고, 지난 2019년 순수인을 결성했다. 그들의 목표 의식이란 다름 아닌 ‘어디에서나 원리 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학부 졸업 후 두 작가가 늘 짊어져왔던 고민의 편린들에서 비롯되었다. 노혜인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이들은 예술가의 길이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닌지, 그들이 하는 행위가 과연 일반 향유자들을 위한 것인지 고심을 거듭했다고 한다. 그 결과 이 젊은 두 작가는 상식의 맹점, 고정관념에 대한 반항 의식을 가지고 고정된 프레임에 딴죽을 걸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반란은 자연스럽게 기존에 놓치고 있거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원점으로 환원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니체의 말마따나, 스스로가 낙타와 같은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먼저 성찰하고, 사자의 정신으로 그것을 전복시키며, 종국에는 어린아이의 입장으로 돌아가 변모의 시점을 찾으려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노혜인과 박경수 작가가 순수인의 이름으로 전달하려는 것은 한마디로 ‘표시하는 것과 표시 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들이 전달하는 이야기는 인간이 만들어낸 같은 개념, 가령 언어나 도상을 동원하는 익숙한 표상 작용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순수인이 선보이는 작업의 스펙트럼은 더 넓다. 그들은 작품과 행위자 모두가 객체로서 평등하게 마주하는 상황을 연출하여, 작품을 보는 향유자가 자신만의 경험이나 감각 등을 동원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연상시킬 수 있도록 유도한다. 객체가 발생시키는 현상과 또 다른 객체가 이를 받아들이는 상태에만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순수인의 작업을 보고 있노라면, 해변에서 모래성을 쌓는 아이들이 문득 떠오른다. 파도가 자꾸 밀려와서 모래성을 망가뜨리는데도, 아이들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모래성을 쌓는다. 그들은 오로지 순수한 즐거움을 위해 모래성을 쌓고 부수고 다시 시작한다. 모래성을 새로 쌓기 위해서는 먼저 기존의 모래성을 반드시 허물어야 하듯, 우리가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틀에 짜인 관점을 딛고 우뚝 올라서야 한다.

 

<알던 것 분의 알 것>이라는 이번 전시의 제목은 바로 이러한 원리를 함축하고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감성적인 텍스트들이 감상자들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데, 곧이어 이 텍스트들과 전혀 무관한 드로잉과 영상 작업이 등장하면서 우리가 텍스트를 통해 예상했던 익숙한 연상 작용들이 철저하게 무너져버린다. 여기에 풍선과 거울, 러그 등의 오브제들이 바닥에 마구잡이로 자리한 현상을 접하면서, 감상자는 사회적 약속과 언어를 아무렇지 않게 수용해왔던 프로세스에 근본적인 의문을 품고 생각의 틀을 다시 짜게 된다. 요컨대 모든 것은 알던 것 안에서 이루어지기 마련이지만, 누구나 몸살을 심하게 앓고 나면 면역력이 강해지는 것처럼 우리는 순수인의 작업을 통해 오래된 틀을 깨고 새로운 프레임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코로나 19로 인해 단조로운 일상이 기약 없이 짙어지는 요즘, 예술가적 창의성을 타고났으나 본성을 억누르며 살아가는 ‘낙타’같은 우리에게 하루의 작은 틈을 만들어 줄 ‘놀이’가 필요하다. 예술이, 놀이가 일상으로 들어올 틈을 허락하는 것이다. 대안공간 아트포럼리에서 펼쳐지는 순수인의 자유로운 놀이, 창조하는 유희는 기존의 가치와 규범을 전복시키는 유쾌한 관점을 제공해준다. 순수인의 작업을 경험한 향유자라면 누구나 그와 같은 변화의 과정에 함께 들어섬으로써, 생각의 각도를 달리하고 삶을 새롭게 긍정할 수 있을 것이다.

 

 

 

 

■ 작 가 노 트 

 

한 사람이 어떤 단어를 말하면 그 단어는 머릿속에 이미지로 떠오른다. 하지만 같은 단어를 말하더라도 떠오르는 이미지는 약간씩 차이를 가질 것이다. 가령 ‘집’이라는 단어를 듣거나 본다면 어떤 ‘집’을 떠올릴까? 실내일지도 모르고 집 전체의 모양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어떤 단어에 대한 이미지의 연상작용은 완전하지 않다. 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다 하더라도 현상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언어라는 수단이 생겨난 것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객체마다 경험이 다를 수밖에 없고 그것에 따라 사고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기호를 만들어 현상을 설명한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완벽하게 의미를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어 자체에는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전달되는 기호는 기호일 뿐이다. 그렇다면 의미 자체는 전달되거나 이동하는 게 아니라 전달받은 인식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잠재적으로 있었던 의미가 특정한 기호를 전달받는 순간 생성되는 것 아닐까. 순수인의 이번 작업은 여기서 시작된다.

대상에 가치와 의미를 생성하는 것은 특정한 기호가 아닌 기호를 습득한 객체다. 이런 맥락으로, 작업에서는 텍스트와 이미지를 교차적으로 제공한다. 서로 연관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지만 이것에 대한 판단은 감상자의 몫이 될 것이다. 텍스트와 이미지가 연관이 지어진다면 다른 대상을 떠올리지 않을 것이고 연관이 없다면 이미지에 따른 새로운 기호를 떠올리거나 연상되는 다른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이런 작업에서 의도하는 바는 기호의 새로운 이미지에 대한 연상이거나 이미지의 새로운 기호가 출현하는 것이다. 기호가 정확하게 한 가지 이미지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면, 같은 기호는 수많은 이미지를 지시하고 이것을 모아 보면 모두 다른 대상인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한 가지 이미지를 여러 기호를 통해 이야기할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렇게 한 쌍으로서 연결되지 않은 기호와 이미지는 재배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이미지에 다른 기호를 배치한다고 해서 의미가 변질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호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원리 역시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모든 의미는 정신에 이미 내재되어있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시작된 지 알 수 없는 기호에 의해 의미 자체가 퇴색되진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의미가 생성된 계기와 출현하는 과정이다.

이런 표상 작용 전체를 흔드는 작업을 통해, 의미가 형성되는 과정을 되짚어 보고 하나의 대상이 특정한 기호라는 프레임 안에서만 의미를 부여받지 않고 대상 자체로 인식될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싶다. 대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단지 보이는 측면뿐 아니라 보이지 않게 암묵적으로 정해진 메커니즘과 패턴까지 확장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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