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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덕 <물고기+ 자리> 박상덕 <물고기+ 자리> 박상덕 <물고기+ 자리> 박상덕 <물고기+ 자리> 박상덕 <물고기+ 자리>

박상덕 <물고기+ 자리>

박상덕 Bak Sang Deok

<물고기+ 자리>

2015. 02. 25 (wed) – 03. 14 (sat)

박상덕_첫사랑자리_주워온것들 혼합매체, 모래_가변설치_2015 (2)

 

대안공간 아트포럼리는 2015년 첫 번째 전시로 박상덕 작가의 <물고기+자리>전을 개최한다.
아트포럼리가 2012년 부천 지역에서 처음으로 시행하여 4년째에 접어든 사슴사냥 레지던시의 3기
작가로서 참여하며 활동한 결과보고전이기도 하다.
박상덕 작가는  (고)구본주작가의 서포터즈로 시작해 2009년 용산참사 현장, 평택 쌍용, 부산 한진,
제주 강정, 평택 대추리, 인천 콜트와 같이 돈과 공권력 앞에서 짓밟힌 개인들의 처참한 삶이 얽힌
현장에서 예술로 연대를 하는 파견미술가의 이력을 갖고 있다.
작가가 태어난 날의 별자리이기도 한 전시 제목 ‘물고기+자리’는 첫사랑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첫사랑
자리」, 장애인활동보조인으로 일했던 약 3년여의 시간을 돌아보는 영상 「반」, 2013년 철거되어 지금은
사라진 인천의 콜트 기타공장에 해고된 노동자들의 이웃으로 10개월간 폐쇄된 공장에 들어가 지내며
설치했던 작업의 이미지와 오브제, 시간들을 응축한 「콜트콜텍의 벽」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는 2월25일부터 3월14일까지이며 작가는 작업실에서 사용하던 손수 제작한 책상도 전시
공간 한쪽에 놓아두고 전시기간동안 머무를 예정이다.

 

‘너’의 존재, ‘나’의 근거

드문 쓸모, 귀한 쓸모
작가 박상덕은 버려진 것들을 주워 모은다. 낡고 비루하지만 아직 쓸모가 있는 것, 쓸모는 없지만 그 자태가 (나름대로) 아름다운 것, 쓸모는 불분명하지만 일단 줍고 봐야 할 것 같은 것들을 보이는 대로 수집한다. 처음에는 재료 살 돈이 없어서 시작했던 그 행위가 어느새 몸에 밴 습관이 돼 버렸다. 그의 작업실에 산처럼 쌓여있는 온갖 폐품이 그 사실을 방증하고 있다. 작가의 말(고백)에 따르면, 그가 버려진 것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은 그것들이 추레하고 가난한 자신과 닮았기 때문이다. ‘폐품’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작가는 스스로를 결여된 존재라 인식한다. 그러나 그 결여된 것들의 미래는 결핍이 아닌 공백으로 재탄생한다.
작업 <쓸모를 잃은 버려진 것들>(2014)은 사용된 재료가 전부 주워온 것들로 이루어진다. 객지에서 주워온 돌, 차가 밟고 지나간 약품 용기, 퓨즈가 끊어진 램프, 비 맞아 녹슨 볼트와 너트, 파도에 떠밀려온 휴대폰 충전 잭 등 현실에서 이미 ‘최후’를 맞이한 물품들이 캐리어에 가지런히 담긴다. <무빙트리엔날레_메이드인부산>(2014)展에 출품했던 이 작업은 작가가 그동안 모아온 버려진 것들을 가져다 불특정 다수와의 접속을 시도한다. 작가는 쓸모를 잃어버린 것들의 쓸모를 다시 찾아줄 그 또는 그녀를 위해 정성스럽게 매뉴얼을 제작한다. 물품이 발견된 시기와 장소, 그것의 용도에 대한 상상이 기재된 매뉴얼은 초라하고 하찮다고 여겨져 지금껏 누구도 알아보지 못한 ‘버려진 것들’의 단독성singularity을 전면에 드러내며, 그들을 ‘존재’로서 맞이해줄 ‘인연 찾기’에 나서고 있다. 또한, 그 매뉴얼에는 물품을 가져갈 사람은 자신의 별명이나 이름을 해당 페이지에 적어놓고 가야 함이 명시돼 있으며, 데려간 물품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은 잘하는지 안부도 전해주기를 부탁하고 있다. 물론 작가의 이메일 주소와 휴대폰 번호를 남겨놓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러한 친절하고 꼼꼼한 작가의 애정에 대한 응답은 전시가 시작되고 열흘 쯤 지났을 무렵, 구부러진 쇠붙이가 문고리로, 폐농기계에서 나온 톱니바퀴가 아령으로, 공업용 철제 부품이 장신구로 변신한 (쓸모를 찾은) 물품들의 근황으로 도착한다. 비애감으로 시작된 작가의 폐품 수집은 어느덧 작가의 감정적 대체물을 넘어서 ‘감각의 분배’로 확장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작업은 작가(물품)가 처한 궁핍한 환경과 비루한 현실을 반영하고 관조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그 현실의 개선이나 전복에도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작업이 ‘작업적 유희’, ‘예술의 인터액티브interactive 기능’ 과 같은 간편한 말로 축소되지 않는 지점이기도 하다. 물론 익명의 사람들이 작가의 기발한 발상에 웃고, 그 행위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 작업의 외피에 불과하다. 개명한(개조된) 그 물품들은 누군가의 일상에 (부)자연스럽게 안착해 자신의 불운을 행복의 등가물로 제시하며, 체계 바깥으로 밀려난 삶들에 일방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을 가뿐히 비껴가고 있다. 그것은 현실적 필요(쓸모)에서 배제된 불운한 삶이라도 일단 버티면서 즐겨보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하여, 상실의 이력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형질 변화를 받아들이는 그 존재들은 매 순간 새로운 본질을 획득한다.

사소한, 부질없는, 무력한
사실, 이러한 ‘쓸모없음’을 떠안는 행위는 <콜트콜텍>展(2012)이 끝난 뒤에 제작한 <콜트콜텍의 벽>(2015)에서 보다 강하게 나타난다. <콜트콜텍>展은 콜트/콜텍 악기공장에서 기타를 만들던 노동자들이 2007년부터 시작된 부당한 정리해고와 공장 폐쇄에 대항해 투쟁하는 과정 을 함께 겪는 전시였다. 작가들은 폐쇄된 공장에 점거해 벽화를 그리거나 퍼포먼스를 하고, 노동자들은 밴드(콜뺀)를 결성해 공연을 하면서 다 같이 노동자들의 인권과 노동권을 외쳤다. 그럼에도 투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그리고 그 ‘사건’은 작가에게 끊임없이 회귀하며, 철거된 <콜트콜텍의 벽>을 재현하게 했다. 작가가 <콜트콜텍>展에서 했던 작업은 공장 폐자재를 가져다 만든 <코끼리>(2012)와 <연영석 오마주>(2012)라는 퍼포먼스이다. 큰 맥락에서 볼 때, <콜트콜텍의 벽>은 앞의 두 작업이 갖는 의미와 유사하지만, 그것을 제작한 연유가 해고무효 소송에서 연이은 패소 이후 시작된 ‘헐벗은 삶’에 대한 자각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계란판을 겹겹이 쌓아 올려 만든 그 벽에는 작고 사소한 물품들이 걸리거나 놓인다. 그것은 작가가 폐쇄된 공장을 거닐며 발견한 철거의 흔적들이다. 작은 화분, 귀퉁이가 마모된 그림 액자와 같은 공장의 유품들이 그 부질없는 행위(계란판 쌓기)에 아무 말 없이 동참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업은 격렬한 고투라기보다는 끔찍한 잔혹극이 상례가 된 지금-여기에서 슬픔을 집적하는 무력한 개인에 대한 은유에 더 가깝다. 그러나 그 무력감은 자조적 독백과는 거리가 먼, 자본과 시스템의 언어로는 읽히지 않는 ‘다른’ 감각을 생산하며 ‘몫 없는 자들’의 실존과 자리를 재구성하고 있다. 그것은 타자에게 다가가려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타자의 몸짓과 표정, 말소리와 숨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작가는 투쟁 현장에서 외롭게 사라져 가는 물품들을 모으고, 그것들의 기능과 역할을 유지할 수 있도록 벽을 세운 것이다. 특별한 조치와 개혁은 아닐지언정, 기존의 통념과 감각으로 해석되지 않는 행위임에는 분명하다. 게다가 그러한 계란판으로 구성된 벽은 평면이라는 점에서는 벽화 벽화는 1980년대를 기점으로 판화, 걸개그림 등과 함께 민중미술에서 자주 등장하던 표현 방식으로서 당대의 현실을 발언하는 비판적 리얼리즘의 특성을 강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그러한 벽화는 외부작용에 의한 파손 가능성뿐 아니라 유지보수 비용 또한 적잖이 요구되며, 무엇보다도 특정 발화가 종식된 이후에는 그것의 기능과 의미가 소실될 여지가 있다. 민중미술에서의 벽화는 영원불멸의 화이트 큐브의 미학을 배격하며 등장한 미학적 공습이기 때문이다.
와 별 차이가 없으나, 언제든 분리와 접합이, 정착과 이동이 용이하다는 점에서 벽화의 고정성과 일회성을 보충하고 있다. 때문에 <콜트콜텍의 벽>은 체계에 포섭되거나 외부요인으로 인한 훼손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는 강력하고 견고한 시스템을 횡단하기 위한 가난한 자(작가)의 전위적이고 윤리적인 매체 활용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위적이고 윤리적인 매체 활용법은 예상치 못한, 체계의 통제와는 무관한 지점에서 훼손되기도 한다. 최근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개최된 <조우accidental encounter>(2015)展은 박상덕의 <콜트콜텍의 벽>을 “익숙한 사물이 예술적 사물로 재탄생”된 ‘사례’ 중 하나로 분류하며,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유희”의 관점으로 치환시켰다. 전시장에서 관객은 주변의 밝은 조명 때문에 <콜트콜텍의 벽>에 투사된 영상 이미지와 텍스트를 온전히 볼 수 없으며, 게다가 (평소와 다르게) 화려하고 매혹적인 일상품들의 집합 앞에서 관객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어쩔 수 없이 무한한 시각적 탐닉, 즉 구경거리spectacle로 귀결된다. 전시의 기획 의도가 일상과 비일상,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에 초점을 둔 것이라면, (작업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물리적 형식 내부에 각인된 내용과 태도에도 소홀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작업의 핵심은 작업이 투쟁 현장 안에서 발화되는 집단적 단일성 안으로 수렴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엄밀히 따지면, 작가는 콜트콜텍 기타공장 노동자들의 농성에 직접 참여하지도 않았고 작가의 말에 따르면, 그는 전시기간 동안 기타공장 노동자들과 “놀고, 먹으며”, 그들을 알아가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노동자들과 함께 전경 방패를 막아서고 재판 당일에 피켓 퍼포먼스도 감행하면서도 노동자와 현장 작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피해 당사자와 비당사자 사이의 좁혀질 수 없는 ‘거리’를 체감하며, 자신의 무력함, 연대라는 그 한정된 ‘우리’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사회/정치적 미술의 일반적인 형태를 따르지도 않았다. 그는 상황과 행위의 올바름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 채 그 현장에 가담하고 있는 작가-주체에게 ‘난(넌) 누구냐’고 묻는다. 그것은 실상 ‘관계(연대)’에 대해 고민하기 위해 던지는 첫 번째, 가장 중요한 질문이며, 이질적이고 낯선 자신을 만나기 위한 (예정된) 절차라 볼 수 있다. 자신을 “가난하다”고 말하는 작가는 노동자들의 헐벗음 안에서 가느다란 떨림을 느낀다. 즉 버려진 것, 쓸모를 잃은 것, 곧 사라질 것들을 주워 담는 작가의 행위는 불확실한 삶을 견디고 있는 작가 자신에 대한 위로인 셈이다.

고통의 의무
그러나 그 위로는 때로 어긋나기도 한다. 작업 <반>(2015)은 작가가 4년간 장애인 활동보조를 하면서 만난 (의사 표현이 극히 제한적인) 중증장애인 B‘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궁극에는 그 중증장애인 ‘B-되기’에 도달해가는 과정을 담는다. 사실, 이 영상의 시나리오는 파견미술가들 ‘파견미술가’는 작가 전미영, 이윤엽, 전진경, 나규환, 이윤정을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되풀이되는 불가해한 현실-GM 대우 비정규직 농성장, 기륭 전자, 용산 참사 현장 등-에 들어가 그것의 문제를 제기하고, 미술을 통해 “꿈과 희망과 연대”에의 의지를 실천하고 있는 작가 집단이다. 『끝나지 않는 전시』, 용산참사 추모 파견미술 헌정집, 2010, p. 6, 참조.
과 함께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준비했던 것이었으나 결말에 대한 동의를 얻지 못해 중단됐다. 그 거부된 시나리오의 내용은 인터뷰어가 중증장애인 B에게 “단 한 번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어떤 선택을 하겠나?”라는 질문에 B가 ‘자살’을 선택하며 끝나는 이야기다. 그러한 극단적 결말은 죽을 때까지 수동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중증장애인 B의 존재를 그의 감정과 욕망에 근거해 다시 쓰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주체의 윤리)에서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영상은 당시 ‘자살’이라는 부정적 정서에 포박되어 시도도 못 해보고 좌절되었다. 그리고 그 좌절된 B의 존재론은 올해 박상덕의 개인전 <물고기+자리>로 귀환한다.
영상은 중증장애인 B라는 사회적 타자의 언어, 그 텅 빈 말을 알아듣고, 거기에 응답하는 작가의 비이성적 행위들로 점철된다. 가령 겨울날 B의 외출은 금지 돼 있다. B가 작가의 목을 휘감은 채 창밖을 바라보며 칭얼대도 외출은 안 된다. B의 모든 생활은 언제나 담당 의사의 지침에 따르는 B의 어머니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 상황에서 작가는 B의 어머니에게 수차례 B의 표정과 몸짓, 신음의 의미를 읽으며, 밖으로 나가고 싶은 B의 의사를 전달했다. 그러나 B의 어머니는 B의 뇌 기능과 안전을 운운하며, B의 어떤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작가는 의사와 B의 어머니 몰래 B를 데리고 외출에 나선다. 그날 B는 비교적 평온해 보였으나 다음날 간질 증세가 심해졌다. 알아들을 수 없는 B의 언어를 응시하며, 그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했던 작가의 행위는 결과적으로 B에게 육체적 고통을 준 셈이다. 물론 B의 욕망이 B의 생명과 결부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날 이후 B의 욕망이 발현될 가능성이 더욱 희박해진 것은 사실이다. 다가갈 수 없는 타자와의 만남은 그러한 실패를 몇 번 더 겪고 나서야 미약하게나마 이루어진다.
타자의 삶을 발화하고자 하는 작가는 자신의 침대에 누워 B를 연기한다. 영상에서 한순간도 쉬지 않고, 마치 랩을 하듯 빠르게 읊조리는 내레이션은 작가가 B에게 다가가기 전 ‘나’라는 견고한 막을 허무는 의식ritual으로 볼 수 있다. 그 안에서 분열적으로 나열되는 온갖 감정과 행동은 한데 뒤섞이며 무화된다. 의식을 끝낸 후, 작가는 B가 사용하는 언어를 모방하며, B의 고통을 자신의 육체에 기입한다. B를 가장假裝하는 작가의 음성은 더듬거리다 괴성을 지르고, 묶여 있는 두 팔은 격렬하게 흔들리며 위태롭게 허우적댄다. 그럼에도 끝끝내 작가는 B가 되지 못한다. 아주 흐릿한 잔상처럼 B를 경험할 뿐이다. 그러나 작가가 자기 몸을 관통해 B를 감각하려는 실천은 타자를 주체의 언어로 번안하지 않기 위한 결단이며, B(타자)와 자신(주체)의 거리를 손쉽게 봉합하지 않겠다는 윤리적 태도임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렇듯 주체는 타자를 통해 성립된다. 그러나 타자에 대한 인식이나 발견이 언제나 ‘관계(연대)’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며, 설사 관계로 연결된다 해도 그 관계가 항상 수평적일 거라는 생각은 주체의 오판이고 오만일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관계는 타자를 보고, 알고, 이해하는 데 있어 실패의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며, 궁극에 타자의 타자성은 주체의 자족적 욕망 안에서 소비된다. 즉 그것은 ‘타자 만들기’에 다름 아니다. 그런 점에서 박상덕의 작업이 주목되는 이유는 타자와의 동일시, 즉 ‘관계맺음’에서 출발하지만, 최종 결과물에는 단절될 수밖에 없는 주체와 타자의 관계, 더는 좁혀지지 않는 둘 사이의 ‘거리’를 오롯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한 작가의 ‘실패’는 타자와의 만남이 같음(유사한 처지)을 공유하는 데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지우고, 제 몸 안에 타자의 자리를 마련함으로써 실현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만남’을 위해 작가는 원인 불명의 고통을 ‘의무’라 여기며, 이해 불가한 타자의 삶을 기꺼이 앓는 중이다.

■이빛나

 

 

박상덕_콜트콜텍의 벽_계란판_3740x6800_2015 (2) 박상덕_콜트콜텍의 벽_계란판_3740x6800_2015(1) 박상덕_콜트콜텍의 벽_계란판_3740x6800_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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