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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야 <나무들의 밤>

대안공간 아트포럼리 기획 초대전

HOYA <우주의 자식들 – 나무들의 밤>

2016.10.11(화)-10.28(금)

 

오프닝 리셉션 10.11(화) 오후 6시

-펑카프릭 공연 오후 7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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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나무, 밤 그리고 대화

-이빛나(미술평론가)

작가 배철호(호야)는 우주(의 자식들)를 호출한다. 여기서 우주란 자연을 지칭하는 것이며, 그 가늠할 수 없는 세계를 작업으로 옮겨오기 위해 작가는 나무와의 ‘소통’을 기획한다. 작가는 인터뷰 중 “나무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여러 번 강조했다. 다소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그 대화법은 적막과 고요 속에서 작가가 나무의 표정을 살피고, 그것의 속살을 매만지며 근원적 형상을 발굴함으로써 실행된다. <우주의 자식들> 연작은 그러한 인고의 과정을 통해 얻어진 결과물이다.
전시장에 모인 <우주의 자식들>(2016)은 수많은 얼굴을 하고 있다. 그들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연령도 다양하며 시선과 자세도 각양각색이다. 특이한 점은 그 얼굴들 주변에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신체 부위가 달려있는데 가령, 얼굴 옆에 성기가 붙어있거나, 얼굴 아래 수많은 귀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식이다. 작가가 재료로 선택한 나무들 역시 ‘온전하다’고는 볼 수 없는데, 그것들은 보통 벼락을 맞아 쓰러졌거나 목재로서 이용가치를 상실한 것들로 옹이가 많거나 벌레가 좀먹은 흔적이 나 있다. 작가는 그러한 폐기될 운명의 나무들을 작업실로 가져와 그것들과 함께 뒹굴며 웅성거린다. 시간에 의해 뒤틀린 형태와 이름 모를 벌레가 지나간 자리는 어떤 모습으로든 ‘변신’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러한 우주의 자식들은 체제에서 ‘변종’으로 취급돼 외부로 방출될 운명에 처한다.
배철호의 작업에서 이러한 기이한(배제된) 생명체의 등장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2009년 개인전 <SIAM>에서 작가는 신체 일부가 붙어서 태어나는 샴쌍둥이를 공존의 이미지로 제시했으며, 자화상에서도 자신의 모습을 나무와 몸이 합쳐진 나무-인간으로 묘사한 바 있다. 요컨대 작가는 체제의 질서와 무관한 존재의 표상을 탐문하고 있는 것이다. 하여, 작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들과 무연한 존재와 접촉하고 관계 맺음으로써 가장 완벽한 형상에 도달하게 되고, 관객 또한 부지불식간에 돌연변이-되기에 동참하게 된다. 이러한 불가해한 상황을 마련하는 것은 개체의 이질성, 즉 빛나는 특질(singularity)을 사유하고 현시하기 위한 작가의 작업적 전략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번 신작에서 그 전략은 캔버스 바깥에서 자연의 몸짓을 참조하고 재편하는 것으로 변주된다.
사실 그의 작업적 변화에는 ‘귀촌’이라는 사건이 있었다. 거주 환경과 생활양식이 달라지면서 작업의 재료는 물론이고, 작업적 방법론과 태도까지 달라진 것이다. 작가는 처음으로 형태와 양감을 점으로만 표현하는 점묘법을 버리고, 자연의 문양을 좇으며 자연과의 ‘합작’을 시도했다. 그 합작이란 자연이 만들어 놓은 표면 위에 작가가 개입하여 부분적으로 색을 입히고 형태를 다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탄생한 <우주의 자식들>은 자연의 무한성보다는 자연에 대한 전형성으로 귀속되는 느낌을 준다. 그것은 그 우주의 자식들이 ‘일반적’ 틀 안에 놓이기 때문이다. 가령, 신체의 구조와 특성으로 구분되는 남자와 여자/아이와 성인, 학습된 정보에 따라 즉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불상과 동물은 어긋난 오해와 과잉된 해석을 가져오지 않는다. 또한, 외형적 통일성을 위해 거친 형상 안에 디테일을 새겨 넣은 흔적은 관습적인 개념과 표상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어떠한 부딪힘도 없이 서로 완전히 통하는 상태는 소통이 아니라 소통에 대한 환상이다.
‘나’와 다른 존재(타자)와의 소통은 수평적 상태에서 시작될 수 없다. 더구나 그 소통의 수단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의미와 결합돼 있는 언어가 아니라 표기할 수 없는 텅 빈 언어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 ‘나’라는 주체의 죽음과 연결된다. 의심의 여지 없이 작가는 자신을 ‘죽이기’ 위해 스스로 수동적 위치에 서고자 했으며, 나무에 작가(주체)의 자리까지 기꺼이 내주었다. 그러나 그 나무는 작업(전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작가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대상’의 자리에 머물러야 했(을 것이)다. 초월적인 에너지를 내뿜는 동시에 의미의 완결성을 지닌 나무는 그렇게 “작품”이 된다.
그럼에도 배철호의 작업에서 부정할 수 없는 가치는 초기 작업부터 최근 작업까지 ‘공존’이라는 (어떤 면에서 한없이 추상적일 수 있는) 주제를 깊숙하게 파고들고 구체적으로 풀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말하는 문명과 자연, 존재와 비존재, 유목과 정착 같은 양립하지 않는 것들의 공존은 작업의 소재로 소비되지 않는다. 작가는 몸으로 체득한 것들을 회화와 드로잉 조각과 설치로 기록하고 전달하는 데 몰두한다. 바꿔 말하면, 그에게 삶과 작업은 분리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번 신작의 경우는 작업적 성취와 실패를 넘어 그가 천착해오던 공존의 영역을 확장하고, 관계의 차원을 높이며, ‘우주적 사건’에 관객을 참여시킨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 우주적 사건이란 주체가 타자와 ‘만나기’ 위해 ‘나’를 지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찰하는 시간이며, 문자로 환원될 수 없는 ‘무엇’을 발견하는 순간이라 하겠다. 아무도 보지 못한 ‘우주의 자식들’은 결국 여기로, 오늘로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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