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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나 <과, 의 것>

디포그배 아트포럼리 신진작가전

김한나 <과, 의 것>

김한나웹자보_최종

 

작가: 김한나

전시일정: 2017.08.18(Fri) – 09.06(Wed)

전시 오프닝: 2017.08.18(Fri) 18:00pm

 

뾰족한 섬의 언저리에서 찾아가는 방법술 : 작가 김한나

최윤정(독립큐레이터‧미술비평)

 

인터뷰 당시는 서로 이야기가 술술 풀려 글을 쓰는데 큰 도움이 되겠다 하였다. 그러나 실제 글을 쓰면서 몇 가지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이유가 뭐였을까? 그 이유를 추적하고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불현 듯 나의 습성을 깨닫게 되었는데, 작업의 기승전결과 문맥이 정/확/히 내안에서 규정되고 독해되어야 만이 글을 쓸 수 있었음을, 말인즉 이성적인 이해도를 넘어선 추상적이고 직관적 감응을 통한 글쓰기는 나에게 너무 힘든 과제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순전히 작가 김한나 때문에.

처음에는 빠르게 읽히는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작품이미지와 문맥, 작가의 언변의 일치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였는데,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빠르게 읽힌다 생각하여 쓴 글은 계속해서 동어반복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의 수다는 많았지만 알고 보니 작가는 그 무엇도 규정한 적이 없었다. 소름 돋는 이 불편한 상황을 당시에는 미처 캐치하지 못하고 확고한 ‘틀(상황)’ 안에서 자신의 작업을 시각화한다는 전제로 글을 쓰려고 보니 나 스스로도 납득이 안 되는, 빈약한 논리는 물론이거니와 그 부담으로 과도하게 육중함을 띠는 졸고가 나와 버렸다. 과감히 버리기로 한다.

이 말을 ‘작가의 이번 개인전 <과, 의 것> 작업이 ‘결과 없는’, ‘과정적인’ 특징을 갖기 때문에’ 인 것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간단히 작가 김한나와 김한나의 작업을 공식화한 문장을 만들어 보았다. ‘출발은 A이나 알고 보면 B같고, B는 알고 보면 C인 듯도 한데, 거기에는 D도 있고 E도 있으니…그게 뭘까’ 그가 자신의 작업경향을 “추상적이고 감정적인 작업”이라 일컫는 데에서 나의 고민이 시작되었어야 한다. 알고 보니 정서의 원형태가 시각화되는 작업이다. 그 실마리를 놓치고 나는 계속 A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흔히 일상 속 단순 불화로 치부되는 것들은 강박적으로 뜯게 되는 손톱, 건조함에 예민해진 피부각질, 잘린 머리카락과 같은 히스테리적 모습으로(…) 잦은 거주지 이주, 스탠다드한 삶을 요구하는 환경, 개인적 갈등 같은 일반적 원인일 수도(…) 그렇기에 나는 구체적 이유를 찾아 서술하고자 하지 않는다.”(2017작업노트 중에서 발췌)

작가는 자신의 순수작업이 일상과의 접점을 찾아가는 과정을, 중요한 가치로 두고 있다. 여기서의 일상은 소담한 내용의 것이 아니다. 어찌 보면 생존에 기반한 현실적인 삶을 감내해야만 하는 장이기도 하고 예술가로서의 성장에 대한 기민한 전략들을 포함한 관계적인 환경을 지칭하는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자신의 작업과 일상의 접점을 편하게 찾을 것이란 보장은 없다. 무엇이든 접점을 찾는다는 노력이 의도와 다르게 어긋날 수도 있고 성공적인 접근단계에서 자기 한계를 계속 깨우쳐야만 하는 피로감을 함께 수반하는 탓에 그만큼 쉽지 않다. 또한 예술가의 삶이란 것이 그렇지 않은가. 이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예술가이면서 여성의 삶을 돌이켜보자. 하물며 수많이 쪼개어져 문화 속에 내재화된 차별전략들 탓에, 정체도 알 수 없고 보이지 않지만 분명 우리를 옥죄고 있을 아비투스는 그 접점을 찾고자 하는 노력에 모래 짐을 한 덩이, 한 덩이 또한 보태고 있는 실정이다.

작가에게서 ‘보이지 않는 것’의 화두는 출발지점으로서 막강하다.

“저는 어쨌든 일상에서 보이지 않는데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게 눈에 계속 거슬리고(…) 그것을 가시화하는 방법을 계속 생각하는(…) 제가 보는(마주한) 사회는 사람을 무디게 만드는 것 같아요. 제가 계속 말을 하는 행위가 되게 예민하고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하고요(…)” _2017워크숍 녹취록 중에서 발췌   

일상, 자기 외부(관계, 사회)에서 느낀 불편부당함은 불화-강박-예민-히스테리를 일으킨다. 마찬가지로 그도 자기 한계로부터 좌절감과 회의감을 몸소 느끼기도 하였고, 한편으로는 그로부터 거리를 둔 관찰자적 시선을 동시에 견지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관계들 속에서 대상화하는 용기도 내보았다. 이는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 수많은 지점들에 처한 자신의 일상이고, 치이고 옥죄는 상황에서도 예술가로서 자신을 자각하고자 하는 ‘처해있음’에 대한 하나의 저항적 실천이었다.

자신의 실천과 일상적 삶의 관계, 때로 이 관계는 갈등 속에서 서로 긁고 할퀴고 상처 내는 등 내적인 불화를 조성하기도 한다. 현실에서 해소되지 않은 불화들이 그렇기에 관계들 속에서 스스로를 섬으로 표류하도록 만들기도 하며, 관계의 주체가 우리를 지배하는 모든 법칙과 세력의 구조에 기울어있다면, 결국은 화해와 타협으로 장식된 ‘굴종’의 상태로 진입하는 것은 각 개인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수순일 터. 한편 상상해보자. 그 관계의 속성에서 ‘은폐된 무엇’을 가로지르는 틈이 생긴다면, 자각과 변화 등 자기영토를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을 그 속에서 찾을 수 있다면, 어쩌면 표류와 갈등은 상황을 반전시키는 동력인이자 방법술이 될 수 있다.   

그에게 미술을 한다는 것은 일상적 삶과의 접점을 찾아나가는 방법술, 다시 말해서 갈등과 은폐를 가시화하는 전략을 통해 그 한복판에 자신을 온전히 위치시키고 그로부터 자기영토를 점하는 것이다. 예술가의 삶이 보편적인 요구와 동떨어진 비일상적인 삶으로 오인된다 해도, 결국 그는 표류를 선택하고 작품을 통해 갈등을 가시화하면서 꾸준히 문제의식을 키워나갈 것이다. 행여나 당장은 답도 없더라도(갈등의 정체를 서술할 수 없을지라도) 현재 그의 작업은 갈등을 관찰하며 그 근본에 다가가는 도정에 밀착해 있기에, 그에게서 꾸준히 창작될 작업들은 자신의 방법술을 연마해가는 과정들을 드러내는 산물이 될 것이다.     

   

그는 이 보이지 않는 것들, 불화의 이미지를 ‘뾰족하고 예리하고 불안한 그 무엇’ 의 뉘앙스로 형상화한다. 그에게 작업의 핵심은 관계의 기류에서 발생하는 폭력, 갈등, 예민함, 날카로움 등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형상화하는 것이기에 그 형상은 다소 추상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는 보편적으로 사물을 인지하는 기본 단위를 원뿔, 구, 육면체로 여기고, 그것들을 조합하여 즉각적인 ‘뉘앙스’로서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의 정체를 상상할 수 있게끔 한다.

결국 ‘고통’, ‘히스테리’ 정서의 원형을 시각화하는 작업이다. 그것은 덩어리, 물성에서 즉각적으로 느껴지는 뾰족하고 예리한 것이어야 한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그가 사용하는 재료들은 주변에서 구하기 쉬한 혹은 익숙한, 일상의 사물들이다. 물론 재료 선택에 있어서 ‘일상’ 내지는 ‘일상과의 접점’에 대해서도 의미화 할 수 있겠지만, 그의 작업에서 굳이 그것이 중요해보이지는 않는다. 보기에 그의 재료들은 그 쓰임새보다도 그가 그저 사물의 일정한 형태에 주목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들이다. 라바콘이나 바나나우유곽, 에어볼 등이 그것이고, 이는 이미 작가가 주목하는 형상적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들로서 작가의 감응적 시선을 통해 발굴된 것들이다. 사물의 ‘쓰임’으로서의 가치는 작가의 손을 거치면서 모두 탈각된다. 또 한편 그물, 케이블타이, 테이프 등은 접합을 통한 덩어리들을 만들 때 주로 사용하는 재료들인데, 이것들은 잇는 부분들을 그대로 노출시켜 형상이 주는 뉘앙스에 ‘불안감’을 더욱 가중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작가가 사물의 ‘쓰임’이 아닌 ‘형상’에 주목하고 있음은 석고캐스팅을 통해 일정한 형태(라바콘 등)를 계속 복제하는 행위에서도 발견할 수 있으며, 다른 덩어리들과의 접합을 시도한 작업들은 이미 일상적 사물을 그것이 아닌 것으로 보이게끔, 그저 위태한 구조물로서 다양한 접합과 체현을 위한 실험물로 여길 수 있다. 결국 작가가 몰입하고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그 무엇’에 대한 자신의 정서와 그 뉘앙스를 외화 시키는 ‘구도와 형상’에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찌르면서 합해지고 부정적이고 날카로워지는 불편한 반응을 일으키는 것. 그가 만들어낸 형상 속에서 발견되는 뉘앙스이다. 이 뉘앙스를 심화하는 또 하나의 지점은 ‘주관/개별의 영토’에 관한 물음이다. 작가는 가장 객관적으로 인지 가능한 개별의 영토를 제곱미터 등의 단위가 아닌 ‘평’으로 환산한 작업으로 선보이기도 했다. 2016년 발표한 <점점 얇아져 날카로워지는,>은 인지 가능한 영역의 환산치인 평, 가장 기본으로 한 평짜리 개인의 영토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업은 폐허의 잔해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이다. 철망에 불안정하게 붙어있는 자신의 몸(손)을 들여 문지르며 더 얇게, 자신의 경계를 보장받지 못할 정도로 온갖 재료들이 서서히 탈각될 것 같은, 안전하지 않을 듯 한 벽면공간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바닥 쪽 벽면 역시 훤히 뚫려 심리적인 안위를 보장받지 못하는 형국을 보여주고 있다. <( )평>(2015)은 공유지 아닌 공유지가 되어있는 텅 빈 공터에 대한 상상력을 담는다. 이 땅을 자신이 마주한 일련의 중산층 계급의 사람들은 어떻게 사용할까에 대해서 관찰한 일종의 ‘인상일지’로서 땅을 분할하고 인공의 것들을 입혀보는 시도였다. 마찬가지로 2015년 선보였던 <파랑은 푸르지 않고, 초록은 파랗지만도 않다>는 둥글고 온전한 파란색 에어 볼들에 파란페인트를 거칠게 칠해놓고, 노끈-마찬가지로 연결지점이 노출된 재료-으로 묶어 울퉁불퉁한 덩어리들로 마치 온전하지 못한 암세포와도 같은 형상을 만들어내었다. 여기에 뾰족한 각재들을 사이사이 ‘찔러’넣음으로 인해 당장이라도 파란물이 떨어질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했는데, 이 작업에서 그는 사회-관계에서 도덕성 내지는 신뢰감의 색상으로 상징되는 파란색을 훼손하고자 한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스스로의 심경을 여실히 대변하는 작품이었다.

특히나 상징적으로 몇 개의 각목쪼가리와 바나나우유병으로 만든 작은 조각인 <Things left>(2017)와 검정테이프와 비닐로 단단히 포장되어 내용물을 알 수 없는 <Either A or B, Neither A nor B>(2013)은 작가가 특히 애착을 가지고 있는 작업이기도 한데, ‘알 수 없는’의 뉘앙스와 불안한 구도에 대한 심리를 즉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도록 하는 실험 작업들이다. 이 작업들은 이번 개인전 <과, 의 것>(2017)에서 연속적으로 만들어져 선보이는 ‘작은 조각들’의 뉘앙스를 가늠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복선으로 여겨도 좋을 것이다.   

이번 <과, 의 것>(2017)은 애초 <매일의 조각>이라는 가제에서 출발한다. 이 작업은 일상에서 발견하는-아마도 마찬가지로 그것의 구도와 형상에 주목하여- 작은 사물들에 작가의 손을 통한 가공과정을 거쳐 전시기간 내 연속적으로 작은 조각들을 생산하는 것이고, 이는 전시공간의 장소적인 특성을 활용하여 설치하기도 한다. 설치물들은 공간을 분할하기도 하고 합치기도 하며, 바깥에서 들여다보는 상황들까지도 고려하여 발란스를 견지하며 배치되지만, 또한 특유의 구도와 ‘과정적’이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음’에 의한 심리적 긴장을 유발시키기도 한다. 전시장은 ‘ㄴ’자 구조의 형태이고 한쪽 면은 전면이 유리로 되어 있어 중정과 연결된다. 또한 마주보고 있는 공간은 연속적으로 작은 조각물들을 생산하는 아티스트의 스튜디오이자 전시 중에 교체되고 전시장에서 ‘탈락된 조각물’들을 다시금 재배치하는 장소로 활용되기도 한다.

전시장을 포함한 작품 전체는 작가의 문제의식을 시각화하는 하나의 유기적인 생명체로서 매시간 혹은 매일의 변용과정을 거칠 것이다. 새로 놓여 져야 하는 작업들로 인하여 그 위치를 점하고 있던 기존의 작업들은 그대로 무용의 것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전시기간 내내 변용을 겪는 상황들에 대한 흔적이자 증거이고, 작가의 행위에 대한 추보식 구성을 의미화 하는 주석으로서의 역할을 지니는 것들이다.   

어찌 보면 우리 모두는 세계 속에서 독한 생의 투쟁들을 겪고 있는 몸들이다. 전체의 부분으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수동성을 시험 당한다. 그 속에서 자기의 영역을 구축하고자 하는 것, 그것은 전체의 폐부에 접근하고 자신을 이에 동일시하는 고통을 수반하기도 하지만, 그렇기에 자신이 원하는 유토피아의 근간으로 접근할 수 있는 동력을 획득할 수 있다. 미세한 균열지점들, 예술은 때로는 은폐된 것들을 들추어 세계에 맞서는 ‘의식’을 주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는 그 스스로도 첨예한 감정의 한 복판에서 자신을 견뎌냄과 동시에 자신을 구제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할 수 없다. 작가 김한나는 현재 바로 그 지점에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마치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 수도 있고 또한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보이는 것 같기도 한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를 들추어 덩어리로 환산하는 그러한 ‘뾰족한 섬’ 같다. 뾰족한 섬에서 연속적으로 생성될 앞으로의 이야기들 역시 예술가로서 자기영토를 향한 유의미한 저항인 선에서, 이번 개인전 과정에서 선보일-아직 완성되지 않는 그 모든 매일의 조각들을 포함하여- 예술가에게 일상적 투쟁의 의미를 현시하는 것으로 그렇게 나 역시도 틈틈이 관찰해보고자 한다. 결국은 나의 비평도 아직은 끝난 게 아니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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