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균 〈분홍·밤 Candlelight night〉
박영균 Park Young-gyun
<분홍 ■ 밤 Candlelight night>
2008.12.10(wed) – 12.21 (sat)
ㅇ
액티비스트 박영균의 작업실 발(發) 명상
고전적 미디어인 회화를 통해서 뉴미디어 시대의 시각이미지를 포착하는 일이 박영균 근작의 핵심이다. 어느덧 40대 중반에 이르러 작업실에 앉아있는 작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며 그린 이 그림들은 그래서 ‘작업실로부터의 명상’이라는 언어에 제 값을 할 수 있는 그림들이다. 박영균이라는 예술가 주체와 사회적 현실 사이의 간극을 인정하고 그 상태로부터 출발한 작업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회화라는 올드 미디어로 현실을 따라잡고 읽어내기란 얼마나 버거운 일인가를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의 작업들은 진솔하다. 그의 회화는 자기 고백을 담고 있다. 아파트 거실의 소파를 그릴 때도 그랬다. 지금의 박영균은 한 사람의 네티즌으로서 인터넷 창을 통해 세상과 만나며 동시대의 흐름을 따라잡기 위해서 마우스 클릭을 하고 앉아있는 자신의 시선을 오롯이 담고 있다.
박영균 근작들은 작업실에 앉아있는 예술가 주체가 그 바깥과 만나는 방식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최근의 그는 인터넷을 통해서 광장을 만나왔다. 이미 잘 알려진 바대로 박영균은 거리에서 움직이는 거리의 화가였으며, 지난해에 완성한 대추리 영상 다큐 <들사람들>을 만들기까지 분주하게 현장을 드나드는 예술가이다. 젊은 날부터 지금까지 미술운동 그룹의 일원으로서, 공동육아와 대안학교를 만들고 이끈 학부모로서,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감독으로서, 현장예술의 기록자로서 살아온 박영균은 386세대를 대표하는 반듯한 아트 액티비스트이다. 그런 그가 올해에 펼쳐진 일련의 광장 현상에 대해서 인터넷 매체를 통해서 정보를 수용하면서 그것을 매우 객관화한 외부의 사건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는 올해에도 몇 차례 거리로 나간 게 사실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의 예술이 바깥을 바라보는 창으로서의 미디어 자체에 관한 흥미로운 해석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박영균의 근작은 스타일의 문제에 있어 이전과 다르다. 인간이 아닌 인형을 다룬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그동안 아크릴릭 페인팅을 주로 해왔던 그가 모처럼 끈끈한 유화로 그려낸 근작들은 솜씨 좋은 페인터 박영균의 회화적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그의 최근작들은 플라스틱의 매들맨들한 질감과 화려한 색채에 대한 탐닉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유년기 시절에 체험했던 나무나 흙으로 만든 물건들과 확연하게 차별화한 새로운 물건으로서의 플라스틱에 대한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가기까지 한다. 대량생산 대량소비 사회의 심볼과도 같은 플라스틱은 인간의 형상을 재현하는 데에 있어서도 매우 탁월했다. 플라스틱 인형의 등장으로 인해서 우리는 그 이전보다도 훨씬 다양한 방식으로 인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만나왔다. 플라스틱 인형은 현실에 대한 재현 기제로 작동하는 것은 물론 그 너머의 판타지로 기능해왔다.
박영균이 주목하는 플라스틱은 바로 이 대목, 그러니까 인간의 형상을 재현하는 것은 물론 판타지를 조작하는 물질로서의 특성이다. 그렇다고 해서 박영균이 플라스틱 인형 그 자체에만 탐닉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이 물건들의 문맥을 타고 넘어서 자신의 내러티브를 구축하는 방법론으로 사용하고 있다. 박영균의 회화적 발언에 등장하는 인형들은 동시대 인간에 대한 그의 진술을 위해서 등장하는 대리 표상인 셈이다. 그가 채택한 인형들은 레고 인형들을 비롯해서 카우보이, 솔저, 미미 등의 우리 눈에 많이 익은 인형들이다. 이들 대리 인간들이 펼치 보여주는 사건과 상황들은 현실에 대해 비판적 지식을 쏟아내려는 리얼리스트 박영균의 언어를 훨씬 더 풍부한 은유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다.
근작에 등장하는 인형들은 실재의 대리 표상이면서 동시에 그 물질 자체에 관한 기호학적 감성의 재발견이다. <초록 바탕 위에 플라스틱을 머금은 플라스틱 인형>은 매끈하게 다듬어진 플라스틱 재료의 외형적 특징들을 표현하고 있다. 군인의 복장이 띄는 녹색의 색깔과 생명, 희망 등을 담을 법한 녹색의 공존, 이 아이러니를 그림으로 담은 것이다. <쫘아악> 연작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쏟아지는 물대포 이미지 앞에 등장하는 레고 인형들과 미미와 만화 캐릭터들 사이로 현실의 처절한 체험은 기억 저편 너머로 아스라이 미끄러진다. 중요한 것은 그 미끄러짐이 그의 예술적 성찰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근작에서 박영균 내러티브의 다수를 이루는 것이 촛불 내러티브이다. 그는 작업실에 앉아 그 바깥을 중계하는 창을 통해서 촛불소녀 캐릭터를 만났다. 조용필의 단발머리를 흥얼거리며 그는 대작 페인팅 촛불소녀를 그렸다. 그는 2008년에 만난 소녀들에 대한 기억을 이 캐릭터 속에 담고 있다. 한 시대를 대변하는 한 컷의 이미지를 회화 작품으로 남겨서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이 이 한 장의 대작 페인팅으로 남았다. 소녀를 데려가는 세월 속에서 촛불의 기억은 점점 희미해질 것이다. 윤곽선을 흐리게 만든 것도 이 때문이다. 뿌옇게 흐린 경계 속에 상호성이 부족한 우리사회의 구조적 소통부재의 상황이 담겨있다.
3미터가 넘는 대작 <분홍밤>은 플라스틱 인형들의 군상을 통해서 동시대의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 풍선을 들고 있는 아이와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엄마도 있고, 의사도 있고 학생도 있다. 배경의 줄무늬는 올드 미디어인 회화의 뒷심 같은 것을 드러내기도 한다. 줄무늬뿐만 아니라 인형을 등장시킨 것 자체부터 그렇다. 이 작업은 현실에 관한 재현일 뿐만 아니라 회화 자체에 관한 저항이기도 하다. 회화의 권위를 비틀고 뒤집어 버리는 것 말이다. 회화의 권력, 심미적 가치를 담보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어 마지않는 회화의 미학적 권위를 부정하는 일종의 키치 전략인 셈이다.
만화를 회화로 옮겼을 때의 역전 상황도 같은 맥락이다. <쫘아악> 연작들에서 보듯이 물줄기와 레고 블록들이 공존하는 상황이 그렇다. 카우보이 아가씨 인형과 풍경이 한 화면에 공존한다. 그는 난 데 없이 판타지를 가진 낯선 풍경들을 회화 작품 안에 끌어들이고 있다. 상투적인 풍경을 끌어들이고 인형과 만화 이미지를 배치한다. 세 가지의 이미지가 중첩되면서 마치 싸구려 그림을 재배치하고 확대했을 때 나타나는 묘한 상황을 만드는 것이 박영균의 전략이다. 물줄기에 등을 돌리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급박한 긴장감을 끌어내기보다는 서로 밀착해있는 한 쌍의 남녀를 로맨틱한 시선으로 들춰내기도 한다.
그는 광고와 애니메이션, 게임 등에 나타나는 이미지들을 회화 작품으로 번역했을 때 나타나는 낯선 상황을 담아내곤 한다. 올드 미디어인 회화 작업을 하는 화가로서 우리 주변을 떠돌고 있는 다양한 시각 이미지들에 대해 비판적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재배치하는 작업들이다. 인터넷 미디어를 통해서 거리의 현실을 실시간으로 접하면서 마치 이라크 전쟁의 이미지를 불꽃놀이 정도의 상황으로 인식하며 CNN을 지켜봤을 때와 비슷한 심정으로 거리의 상황을 인터넷 방송으로 실시간 중계로 지켜보는 예술가 주체 박영균의 체험을 회화적으로 담고 있다.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그는 나름의 일관성을 잊지 않고 있다. 그는 2002년에 발표했던 <난 나를 모욕한 자들을 관대히 용서해주었지. 하지만 내겐 명단이 있어>를 레고 인형 버전으로 번안한 같은 제목의 작품을 통해서 여전히 자신의 심중에 자리 잡은 독백을 쏟아내고 있다.
예술가의 방, 작업실은 고독한 공간이다. 따라서 화가들의 작업실 작업은 종종 붓질의 본능에 따라 자폐적인 자기언어를 반복재생산하는 관행에 빠지곤 한다. 지난 몇 년간 본격적으로 회화작업에만 몰두하지 않았던 그에게 원초적 본능과도 같이 붓질의 추억을 되살린 공간 또한 그의 처소인 작업실이다. 그동안 공공미술의 현장과 대추리 현장을 누비면서 분주하게 세상과 만났던 그가 모처럼 차분하게 작업실에 앉아서 그 바깥을 바라보면서 붓질을 했다. 그의 작업실 발(發) 예술은 그래서 훨씬 더 성찰적이다. 그의 근작들은 충분하게 고인 우물에서 길러낸 매우 진솔한 자기언어로서 매우 강렬한 내적 필연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 김준기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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