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나 춤과는 달리 현대 미술은 기생하는 인문학이다.
심미성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미술은 때로는 과분한 전방위적 형태를 취한다.
허락받을 곳이 없는 언어는 사용되더라고 용인의 시점에서 다시 사회적 언어의
보복을 감수해야 한다. 사회과학이 유일하게 미술과 대면하는 순간이다.
미술이 사회화 되어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필연적인 사회화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미술은 그 고유한 아름다움을 잃어버렸다. 왜 아름다워야 하는지를
되묻는 것이 미학이라해도 그것이 전부는 아닐테니까 최소한 아름다움은 왜곡된 것이다.
더 이상 분해되지 않는 원색처럼 아름다움도 그러하다.
나의 작업은 그것을 찾는 과정이고 방법에 관한 연구이다. -김동규 작가노트 중
Differ from Performance or Music, Art is a study that must live upon humanity.
Art that can separate itself from beauty has often taken the form of an excessiveness
upon due consideration. Forbidden words might be used, but in the moment that
it meets with the general acceptance one must take the risk of pay back from the society.
This is the only moment that Social Science meets Art.
It might be a situation which Art need to become more socialized,
but this necessary process has forced art to lose its characteristics beauty.
One might question why it needs to be beautiful, even for esthetic reason I do not
believe this is enough, but even the slightest idea of beauty is distorted.
It is like a primary color, which one can not divide anymore.
My work is a contemplation of process and a study of method.
useful art vs useless design
청년은 진리와 진실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세상은 그 둘이 도대체 무엇이 다르냐고
진지하게 묻기도 하고, 왜 그런 말장난에 머리를 쓰냐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사실 청년에게는 이런 고민이 삶의 변두리적인 일탈이라기보다 인생의 중요한 일상 행위다.
그런데 숨쉬기와도 같은 이런 습관이 자신(自身)에게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정작 타자(他者)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인 관심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쉽게 말하면 요즘 세상에 수지맞는 장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청년은 일반 사람들처럼
큰 집을 사고 큰 차를 타는 목표가 가치 있다고 분명 알고 있지만 청년에게는 진리와 진실을
깊게 탐구하는 역할이 훨씬 중요하다. 심지어 자신 말고 그 누가 더 깊은 고민을 해봤을까하고
자문도 해봤다. 어쨌든 청년은 지금까지 가면(假面) 한번 쓰지 않고 생긴 대로 살아온 것뿐이다.
청년은 진리가 진실보다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청년이 말하는 진실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사실이고(facts), 진리는 진실의 구슬을 꿴 것들의 통찰이다(one truth). 그러니까 청년은
진실보다 진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표현해왔다. 청년은 항상 나무보다 숲을 보는 훈련을 해왔고
그런 식으로 작품을 만들어 왔다. 하지만 어느날 정신을 차려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 대부분이
나무에 집착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숲을 지키는 이들은 더 이상 흠모나 시샘의 대상도 되지 않기에
청년의 외로움은 깊어만 갔다. 그래서 청년은 고매한 이상을 잠시 접고, 맘 편히 나무를 향해
한 발짝 두 발짝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청년에게는 언제든지 다시 돌아갈 든든한 베이스캠프가 있었기에.
청년은 진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당장 사람들과 어울려 작위적으로 나무에 대해 공유해야한다는
조급함은 없었다. 청년은 그저 나무에게 오감을 맡겨보고 관찰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엄청나게 많은 상상력이 그곳에서도 진행되고 있었다. 심지어 나무는 숲이 하지 못하는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기쁨과 보람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감각이 무딘 이들에게 예술의 정수를
알리는 첫단추가 되기도 했고, 미적 감성의 가이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마당에 청년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청년은 이제 예술가이면서 디자이너다.
이런 선언과 함께 깊은 고민으로부터 해방됐다. 그렇다고 그 고민이 헛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아직도 마음속 우선순위는 진실보다는 진리가 확고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무게 중심이 틀림없는 결단인 만큼 눈치도 부끄러움도 필요 없었다.
예술과 디자인의 가장 큰 차이점은 누가 관객이냐이다. 예술은 누구보다 주인 스스로 흡족해야 하고
디자인은 오는 손님마다 칭찬을 받아야 한다. 겉으로 표출하는 청년의 물리적 작업이 과거나 미래나
엇비슷하게 보일지 몰라도 양자택일되는 결과에는 요령껏 순응해야 할 것이다.
조각과 가구디자인이 점점 이음동의어가 되는 트렌드다.
그래서 청년의 이번 변신도 역시, 쇼(Show) 한번 하지 않고 생긴 대로 살아온 모습 그대로이다.
-시각이미지전달자 강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