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39 〈공간의 탐닉〉
산업단지 폐산업시설 문화재생 사업 ‘공간의 탐닉’전
전시 작가명 : 강영민, 김기철, 김원정, 김치앤칩스, 랑, 如如 (yeoyeo), 박병래, 박상덕, 배희경, 변지훈, 유비호, 이능재, 이수진, 정기엽, 정혜원, 조형섭, 한석경, 한창민, 허연화+정의석
기간 : 2015.07.16(수) ~ 2015.08.17.(월)
오프닝파티 : 2015.07.18(토) 16:00
주소 :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삼작로 53
open 10:30 – closed 18:00 (월요일 휴관)
문의 : +82(0)32-320-6366~7
주최: 부천시 / 주관: 부천문화재단 / 후원: 문화체육관광부, 한국공예다자인문화진흥원
기획: 이훈희(대안공간 아트포럼리 디렉터), 류자영(삼정동 소각장 문화재생 TF팀장)
부천 삼정동의 소각장은 한번이라도 방문한 적이 있는 작가라면 누구나 가슴 뛰게 하는 매력적인 공간이다.
소각장이 위치한 곳을 보면 삼정동은 커다란 길을 사이에 두고 한쪽은 자그마한 공장, 중소기업들이 빼곡하고 그 일터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많은 수가 외국인들이다. 그리고 길 건
너편은 마을 재개발에 찬성과 반대하는 주민들의 입장차이가 첨예한 주택가가 있다. 이러한 지역의 정책과 경제 논리가 예민하게 작동하는 마을에 거대한 도시의 쓰레기 소각장이 멈춰
서 있다. 얼핏 봐도 삼정동이라는 마을의 지형도는 도시운영의 가치관과 철학이 그대로 드러나는 특징적인 것이다.
그 철학의 기반에는 미술이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대화를 촉발하거나 아름다움에 대한 다른 기준의 예술을 제안하는 등 예술이 갖고 있는 사회적 역할을 중심으로 사고할 필요성이 있다. 지역 특성을 손상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욕구를 담아 낼 수 있는 정치적(?) 결정을 돕기 위한 철학적 가치 기준으로서 말이다.
창조해내는 다른 것, 다른 관점, 다른 무언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한 예술가들의 예술 난장은 물질적으로 구분할 수 없는 무언가로 사람들과 지역사회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오는 7월 15일부터 열리는 ‘탐닉전’은 도시를 결정하는 많은 정치적 판단들과 그 안에 차곡차곡 쌓여진 사람들의 삶 그리고 교감과 소생의 의미가 담겨있는 거대한 오브제로서 공간을 관통하는 제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2015 소각장 프로젝트 ‘탐닉전’은 부천 국제판타스틱 영화제와 부천국제만화축제 기간을 아우르고 있다. 만화와 영화를 도시문화의 주요 키워드로 삼고 있는 부천에 산업으로서의 예술이 아니라 삶으로서, 기반으로서 형상화된 예술을 나누고 싶다는 의도도 담겨져 있다.
■대안공간아트포럼리
‘공간의 탐닉전’
-소각된 기억들의 재생-
“기사님, 삼정동 소각장으로 가주세요.”
“소각장이요? 거기 아무것도 없는데. 쓰레기 태우던데를 왜 가요? 냄새나는데를?”
그렇다. 쓰레기 냄새만 진동하던 소각장은 오늘, 놓쳐버린 기억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다시 태어났다.
필요 있음과 필요 없음의 오판
산업의 발달로 가용 물질이 풍부해진 인류는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에 대한 구분이 이전보다 뚜렷해졌고 필요 없는 것들이 넘쳐나자 필요 없는 것에 대한 완전한 연소를 감행하고자 소각 시설을 만들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소각장이 많이 줄어 들었다. 이는 쓰레기를 태우는 동안 발생하는 유해 연기가 높은 수치의 발암 물질을 발생시켜 환경에 치명적이라는 연구가 발표되었던 1990년대 말 이후 나타난 현상이다. 그렇다면 그 많던 ‘필요 없는 것’들은 다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 걸까. 환경 문제에 대한 심각성으로 말미암은 소각 행위의 최소화는 필요 없는 것을 처리하는 방식의 구조적 개혁을 가져왔다. 그렇게 대두된 개념이 분리수거이다. 분리수거는 필요 없는 것이라 간주된 것들 중 소생 가능 할 가치가 농후는 것들을 분리하여 필요 있는 것으로 환원을 한다는 점에서 ‘필요 없는 것’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부여했다. 분리수거가 야기한 성찰의 기회는 어쩌면 ‘필요 있음’과 ‘필요 없음’의 오판을 줄이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물리적, 사상적 시사성이 생긴다. 다양한 표현의 공간으로 재탄생한 부천 삼정동 소각장에서 열린 ‘공감의 탐닉전’에서 역시 이러한 시사성을 찾을 수 있었다.
소각장이라는 장소에 대한 직접적 해석
이번 전시에서는 필요 없다고 버려진 것들 중 ‘필요 하다’고 판단되어 의미가 부여된 다양한 개념이 옴니버스 식으로 등장한다. 그 중 소각장이라는 장소가 가진 성질에 집중한 작품은 비닐 봉투를 재료로 한 작가 랑의 작품들이 바로 그것이다. 비닐 봉투는 물건을 한데 담아 운반하기 위한 용도로 쓰지만 그 중 쓰레기 봉투는 필요 없는 것들을 한데 모아 묶어 정리하는 기능이 강화된 사물이다. 이는 더러움을 연소하는 역할을 하는 소각장의 기능과 상당히 유사하다. 그런데 작가 랑의 작품의 주된 재료로 사용된 봉투는 꽃으로 재생된다. 게다가 이 비닐 꽃에는 조명까지 설치되어 꽃이 가진 아름다움이라는 상징성은 이전보다 배가 된다. 비닐은 버릴 것을 담아내는 작은 공간에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꽃이 되고 빛으로 대변되는 조명을 통해 생명력까지 얻어 아름다움의 아이콘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소각장이 변화한 과정에 대하여
삼정동 소각장은 버려진 것들이 모이는 곳에서 창작과 표현의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통해 재생된 공간인데, 이러한 과정을 가장 직접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작품은 작가 배희경과 작가 한석경의 작품이다. 먼지를 담은 물방울들을 모빌처럼 걸어 만든 이 작품은 쓸모 없는 것의 대표성을 가진 사물인 ‘먼지’를 실제로 모아서 작품을 만들었다. 이렇게 모인 먼지가 생명의 근원을 대표하는 이미지를 가진 물, 그리고 물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의 물방울로 구현된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 작품은 소각장이 여러 변화를 겪으며 새로운 생명의 공간으로 탄생하게 된 과정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에서 일부러 저지르는 오판들에 대하여
소각장이라는 공간이나 소각장이 다시 태어나는 과정에 대해 읽어낼 수 있었던 작품들 이외에도 사회에서 자칫 ‘필요 없음’의 범주로 잘못 정의한 ‘부정의’에 대해 목소리 높인 작품들은 주로 지하 공간에서 관람할 수 있었다. 지하에 마련된 전시 공간은 지하가 가진 고유의 특성인 ‘빛이 잘 들이 않음’의 성질과 고인 물, 스산한 기계음, 철재를 소재로 런 웨이 처럼 만든 관람객 동선을 조화시켜 기획하였다. 지하 전시공간은 일부러 계단을 내려와서 들여다보아야 하는 특성을 가졌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구태여 관심 가져야만 해결 가능한 가려진 부정의를 어두움이라는 강한 공간적 분위기를 통해 전달하는데 적절했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작가 조형섭의 작품이다. 작가 조형섭은 벽과 천장에 설치된 관들과 소각장이 가동될 당시 쓰였던 기계들을 치우지 않고 작품 설치하였는데 소각장의 공간성 그대로 노출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차갑고 기계화된 모습을 여과 없이 표현하겠다는 의지를 읽어낼 수 있는 부분이다. 최소한의 가공으로 기획된 이 공간에 설치된 것은 나무로 된 낡은 작은 배와 허술한 집하나 이다. 관람객이 이 집 앞에 서면 그 안에 설치된 작은 텔레비전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다. 집 바로 옆에 자리한 낡은 나무 배 앞에는 벽을 가득 채운 대형 스크린을 통해 영상이 나오는데, 이 영상은 지난 해 4월 진도 팽목항에서 침몰한 세월호 사건 현장을 담은 것이다. 권력의 매커니즘 안에서 필요 없는 것으로 오판 당할 뻔한 정의에 대해 은유적으로, 하지만 원색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공간의 분위기와 궁합이 잘 맞는 작품들
한편 햇빛이 유난히 잘 드는 이층 전시 공간에서도 필요한 것과 필요 없는 것에 대한 성찰의 메시지를 다양한 형태로 표현한 작품들이 줄을 이었는데, 사물과 인간의 관계를 통해 ‘인간성’에 대한 표현을 한 작가 상덕의 작품이 가장 대표적이다. 상덕의 작품들은 실제로 버려져 쓸모 없어진 것들이나 고철 등을 재 가공해 만들어졌다. 차가움, 더러움의 정서가 강조된 물성이 화단, 새, 나무 등의 자연물로 재생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화단의 꽃, 새, 나무는 자연물이 가진 자연스러움, 리듬감, 곡선이 두드러진다. 사물이 가진 본래의 정서인 직선적 정서가 작가의 손을 거쳐 곡선의 정서로 다시 태어나 따뜻함이나 자연스러움의 정서를 풍부하게 뿜어낸다. 아무렇게나 찟어진 종이들을 벽에 아무렇게나 이어붙인 정혜원의 작품 역시 이층 전시 공간에서 만나볼 수 있었다. 잘 찟어지기도 하지만 테이프만 있으면 쉽게 붙일 수 있는 종이의 속성은 쉽게 깨지기도 하지만 쉽게 이어지기도 하는 인간 관계 담론에 대한 해석이 가능하다. 또한 이 작품은 인간 관계에서 필요 있는 것과 필요 없는 것의 판단은 종이를 찢고 이어붙이는 행위의 반복과도 같으니 그 둘을 범주화하는 일보다 재생에 집중하는 편이 낫지 않겠냐는 메시지도 읽힌다. 이러한 점에서 이층 전시 공간에 설치된 작품들은 밝은 조도와 넓은 관람 동선이 가지는 공간성과 비슷한 색채의 의도를 담아낸다고 볼 수 있다.
‘공간의 탐닉전’, 그리고 앞으로
삼전동 소각장에서 열린 전시 ‘공간의 탐닉전’에는 20여 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많은 작가가 모여 전시를 한 만큼 작품이 시사하는 주제의식의 통일성이 긴밀하지는 않다. 하지만 연소의 공간이 창작과 표현의 공간으로 재탄생 했다는 공간적 의미와 수직적 전시 공간에서 구현된 전시 구성을 통해 충족 가능했던 다양성의 측면은 각각의 작품이 던지는 주제의식의 통일성을 차치하고라도 이 전시에 내재된 근원적인 주제로 치환되기에 충분하다. 그런 맥락에서 예술 공간으로서 삼전동 소각장이 앞으로 보여줄 행보에 기대를 걸어본다.
■나여랑
헤테로토피아로서의 폐소각장
차이와 통섭이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있는 시대에 장소에 대한 ‘상상’은 가히 무한하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물리적으로는 도시 재생(개발)을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하며, 개념적으로는 중심을 새롭게 이동시키는 움직임이 되기도 한다. 즉 지금-여기에서의 장소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어진 상황에 맞춰 숱한 변이를 거치며,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사회적 공간이다. 그러한 사회적 공간은 지역민들의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외부와의 접속과 혼종적 결합을 시도하며 새로운 공통감각common sense을 구축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부천 삼정동 폐소각장이 ‘미래문화 플랫폼’으로 탈바꿈하는 사건은 주목할 만하다. 200석 규모의 공연·전시 공간인 멀티미디어홀, 아이들을 위한 체험 학습 시설, 레스토랑, 공연과 전시, 회의 등을 할 수 있는 인터미디어데크실이 들어서는 그 문화예술 공간에는 국비 43억 원과 시비 46억 원, 도비 6억 원 등 총 95억 원이 투입되었다. 소각장이라는 “혐오 시설”이 (숭고한) “문화예술 공간”이 되기 위한 비용이다. 최승헌 부천시 문화시설 건립팀장은 “생활쓰레기 소각장이란 혐오시설을 문화예술 공간으로 재단장하는 사례는 전국에서도 흔치 않다”며 “부천은 물론 인근 인천과 김포시민들도 즐겨 찾는 곳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이 지점에서 필자가 의구심이 드는 것은 1995년부터 2010년까지 15년간 제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음에도 결국 “혐오”로 마감되는 소각장에서 창출되는 문화예술이란 (기껏해야) 상권을 넓히고 지가를 높이는 상징 자본 즉, 물신으로 기능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부천 쓰레기 소각장, 공연, 전시공간으로 새단장” 중앙일보 최모란 기자, 2015.7.21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8280858&cloc=olink|article|default
그러한 문화예술 공간을 위해 처음 선보인 행사는 소각장의 반입실과 관리동 1, 2를 전시장으로 사용한 <공간의 탐닉>展이다. 전시는 한 마디로 장관壯觀이었다. 8,000㎡라는 웅장한 스케일에 걸맞은 대형 스크린(김치앤칩스의 <Luna-01_final-leaflet>,2015), 소각장 외부와 내부를 천으로 잇는 설치 작업(이수진의 <The Deep Stay>,2015), 어두운 공간에서 화려한 빛을 발광하며 관람객의 감각을 환기하는 네온 작업(하이브의 <Light Tree: Interactive Dan Flavin>,2014), “문화공간으로 거듭나는 소각장과 부천 시민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하트 모양의 애드벌룬(강영민의 <조는 하트 무지개>,2015) 등 전시에 동원된 대다수의 작품은 소각장의 구조와 분위기에 조응하며, 관람객에게 다양한 시청각적 유희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그중에는 그 유희에서 비껴서 있는, 어둡고 거친 폐소각장 그 자체를 사유하는 작품들도 적잖이 발견된다. 즉 더는 현존하지 않는 소각장의 시간과 공간을 회억하고 각인하는 몸짓들이 신생 공간을 반기는 다채로운 환호 속에 배치된다. 그것은 현실적인 공간 안에서 비현실적인 공간을 구현하는 반反공간, 미셸 푸코의 용어를 빌리면,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의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헤테로토피아란 유토피아Utopia라는 완벽하고 이상적인 가상공간에 맞서는 개념으로서 실제로 존재하지만, 현실의 용어로는 온전히 해석되지 않는, 보편적 형식으로 존재하지 않는 ‘다른 곳’을 지칭한다.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이상길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14, pp. 48-49.
이러한 헤테로토피아는 말끔하게 단장한 문화예술 공간에서 두 가지 유형으로 출현한다. 그중 하나는 현실 바깥의 시간을 외삽하는 시차적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불협화의 공간이다. 그 공간들은 체계에서는 불가능한 상상적 가치들을 양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간단히 부정되거나 간과된다. 그래서 본 글은 헤테로토피아(폐소각장) 안에서 자생하고 있는 작품들을 중심으로 비현실적인 공간의 장소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시차적 공간
작가 박명래와 한석경은 각각 관리동 지하와 관리동 2층에서 폐소각장의 먼지를 ‘전시’한다. 수북하게 쌓여있는 먼지는 소각장이 문화예술 공간으로 변모하기 위해 말끔히 제거돼야 하는 오염원이다. 그러나 두 작가는 그 이물질을 정성스레 쓸어 담거나 이미 과거가 된 소각장의 시간과 역사를 증언하는 존재라 여긴다. 박명래의 사진 작품 <dust>(2015)는 소각장 가동이 중지되고, 문화예술 공간으로도 정비되지 않은 시기에, 말 그대로 ‘폐소각장’(의 내부)을 찍은 것이다. 그 공간은 체계 안에 포함돼 있으나 어떠한 기능도 자격도 박탈당한 반공간의 형태로서만 유지되고 있다. 작가는 그러한 폐소각장을 ‘장소’라 발언하기 위해 소각장의 부자재와 구조물, 난간과 계단을 덮고 있는 먼지를 생生의 증거물로 삼는다. 그 먼지는 체계의 시선으로는 보이지 않는 폐소각장의 존재태로 등장하며, 예외적이고, 소수적인 감각을 현시하고 있다.
한석경 또한 먼지를 통해 폐소각장의 흔적을 각인한다. 설치 작품 <형상기억>(2015)은 관리동 실험실에서 물청소하다 나온 먼지를 물과 함께 풍선에 담아 폐소각장의 시간을 표상한 것이다. 그 먼지는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봐오던-흔해서 무의미한 것으로 느껴지는-먼지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물과 섞여 있는 먼지와 그 밖의 물질들은 천장에 매달려 있는 풍선 안에서 여러 층으로 나뉘고 또 결합한다. 그리고 그것은 관람객이 그사이를 지나갈 때마다 규정할 수 없는 형상과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반복한다. 우연적이고 예기치 못한 상황-관람객의 무신경 또는 과잉접근, 바람이나 온도와 같은 환경적 요소 등-에 따라 매번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 그 이질적 복합체는 실존을 상실한 개체들의 운동과도 슬며시 겹친다. 즉 작품은 폐소각장의 정지된 시간과 기억을 재생시킬 뿐 아니라 ‘몫 없는 자들’의 상실, 결핍, 불행의 이미지를 찢으며, 그들의 변주에 동참하고 있는 셈이다.
반면, 작가 이능재는 폐소각장을 생의 ‘끝’이라 간주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는 폐소각장에서 현전과 부재, 삶과 죽음, 언어와 언어 이전의 언어라는 양극의 지점들을 동시에 취하며 ‘경계’를 부정하고 있다. 작품 <Rosetta stone>(2013)은 작가가 로제타 스톤 로제타 스톤rosetta stone은 1799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군 포병사관 부샤르가 나일 강 하구의 로제타 마을에서 진지陣地 구축 중 발굴한 흑색 화강섬록암의 비석 조각이다. 거기에는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히에로글리프 hieroglyph), 아랍인들이 사용했던 민용문자(디모틱 Demotic: 상형문자의 필기체), 그리스문자로 기원전 196년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공덕을 기리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7644&cid=43667&categoryId=43667
에 새겨진 글자를 옮겨 적은 후 칼로 그것의 테두리를 도려낸 것이다. 3m가량의 종이에 빼곡히 적힌 고대 문자는 작품 표면에서 탈각되어 전시장 바닥으로 수북이 쌓인다. 기표와 기의가 제거된 언어는 우리의 상식적 접근, 이성적 판단을 중지시킨다. 때문에 작가의 말처럼, “비어있는 상태”로만 존재하는 그 언어는 소각장을 현실의 척도에 따라 폐소각장(죽음)과 문화예술 공간(삶)으로 분할하거나 폐소각장을 절대적 타자의 영역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오로지 다르면서도 하나인 것으로 서술할 뿐이다.
불협화의 공간
그러한 현실과 환각이 겹쳐진 공간, 온갖 말들이 뒤섞여 불가해한 언어에 주목(해야)하는 이유는 ‘도시-재생’, ‘문화-정책’이란 허울 좋은 이름으로 유휴 공간을 점유해 체계의 편의에 따라 혹은 자본의 욕망을 위해 소비되는 “소통”의 흐름에 편입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주지하듯이, 현실에서 통용되는 “소통”은 내 의견을 상대에게 전달했을 때, 아무런 오해 없이, 돌아오는 ‘긍정’의 표현으로 완료된다. 자연히 불화를 내재하고, 갈등을 촉발하는 의견과 사건은 소통의 범주에 포함되지 못한다. 이러한 논리에는 일방향적 소통, 동일성을 강제하는 현실법칙이 투영돼 있다.
그러나 작가 김기철의 작품 <Mixed One>은 일반적인 소통의 기능과 의미를 횡단하는 방식으로 소통을 말한다. 관객이 작품을 만나기 전 소각장 반입실 입구에는 낯선 존재들이 마중을 나와 있다. 보이지 않는 그들은 오직 ‘소리’로만 관람객들을 작품이 있는 곳까지 인도한다. 반입실 공간을 채우고 있는 그 소리는 작가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채집한 진동과 높낮이가 다른 70개의 종소리가 합쳐진 것이다. 그 소리의 응집은 아름답다기보다 기이uncanny하고, 조화롭다기보다 불협화에 가깝다. 그러나 관람객은 4m의 원으로 늘어서 있는 스피커들 사이에 서서 그 집합적 떨림에 순간적으로 ‘자동 해제’된다. 우리가 가진 척도로는 의식할 수 없는 그 연대는 자신의 형체를 무화시키며, 서로의 공간에 들어가 오염됨으로써 완성된다. 동시에 그것은 오롯한 주체, 단일한 연대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허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요컨대, 김기철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소통의 형태는 ‘마주침’이다. 그것은 컴컴해서 보이지 않던 공간이 소리와 만나 형태를 갖고, 각기 다른 울림이 ‘자기성’을 거부하며 ‘우리’라는 목소리를 낸다. 앤디 메리필드는 이러한 마주침을 통해 다양한 집단이 형성되고, 연대가 유지된다고 말한다. 앤디 메리필드, 『마주침의 정치』, 김병화 역, 이후, 2015, pp. 104-105.
즉 “어떤 특정한 장소 의식”이나 일부 개인의 욕망을 기초로 하지 않는 한에서 마주침은 “우리의 공통된 삶” 앤디 메리필드, 같은 책, p. 135.
을 조형해 나가는 과정이며, 현시대의 캐치프레이즈로 운용되는 “소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략이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전시장에서 마주치는 불협화의 공간은 문화예술이라는 대의를 위해 부지불식간에 잊히거나 사라지는 비체abjection들과의 만남, 현실의 척도와 거리 두기를 실천하는 주체들과의 만남을 중재하고 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이렇듯 <공간의 탐닉>展은 문화/예술을 위해 계획된 공간 안에서 위태롭고 이질적인 헤테로토피아적 공간을 발견하게 한다. 그 안에는 문화예술 공간으로 변모하는 폐소각장에 대한 응원과 축하보다는 문화자본 시대에 수없이 넘쳐나는 스펙타클-볼거리와 먹을거리가 주축이 되어 재화 가치를 창출하는 장치-이 또다시 탄생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무력감이 자리한다. 동시대의 문화예술은 이미 자본의 영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투자 사업이다. 그렇기 때문에 새롭게 시도되는 문화예술 기획은 단연 상품으로 가공되는 문화예술 현상에 대한 대항으로서 출발해야 한다. 체계 안에 포획된 문화예술은 앞서 언급한 ‘갈등 없는 대화’로 통용되는 “소통”과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건한’ 감동과 정서를 “함께”라고 여기는 비극적 현실에 대해 비판적 의식을 가져야 하며, 그러한 자족적인 문화예술의 순환과 생태에 대해 저항적 태도를 보여야 한다. 그런 한에서 다행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삼정동 폐소각장은 (아직은) 헤테로토피아라는 미결의, 언제나 중심이 부재한 공간의 영역에 위치해 있다. 앞으로 그곳이 심리적인 동질감 대신 낯설고 불편한 질문을 던지며, 지금-여기의 첨예한 감각을 생산하는 반공간이 되길 기대하는 바이다.
■이빛나
7월 22, 2015
아트포럼리에서 하는 전시인거져?
전시장소가 헷갈리네여 ㅠ.ㅠ
7월 22, 2015
대안공간 아트포럼리에서는 공동 기획을 맡았습니다.
전시 장소는 부천시 오정구 삼작로 53번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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