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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자연계약을 위하여 새로운 자연계약을 위하여 새로운 자연계약을 위하여 새로운 자연계약을 위하여 새로운 자연계약을 위하여 새로운 자연계약을 위하여

새로운 자연계약을 위하여

대안공간아트포럼리 공공예술프로젝트

[새로운 자연계약을 위하여]

 

전시명 : 새로운 자연계약을 위하여

전시기간 : 2023.9.21.-10.15.

참여작가 : 김준서, 김태덕, 송차영, 유비호, 이능재, 이동욱, 이송, 이원호, 이윤석, 조형섭

주최/주관 : 대안공간아트포럼리

협력 : (재)부천문화재단 부천아트벙커B39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공공예술사업 

전시장소 : 부천아트벙커B39 (경기도 부천시 삼작로 53) / 032-321-3901

관람가능시간 : 매주 화 / 10:00~17:00 (16:30 입장마감)

ᅠ                          매주 월요일 (9.28-10.3 휴관)  휴관

관람료 : 무료

 

 

이송_그 시간, 그 장소의 그 곳_캔버스 위에 유화_162.2×260.6cm_2023

 

송차영_감응의 풍경-부드러운 물_종이에 펜, 색연필, 수채_45.5×61cm _2023

 

이원호_서식지_8개의 스피커유닛, 와이어, 8채널 사운드, 앰프_가변크기_2023

 

유비호_떠도는 이들이 전하는 바람의 노래(The Wanderer’s Song of Wind)_LED모니터, 의자 비닐(3×3M)다수,메탈등_8개의 영상설치_2015

 

조형섭_( )_그 곳에 머물 자유_재개발 지역에서 채집한 나무 간판, 싱글채널 비디오(00:02:47 Loop)_가변크기_2022

 

 

 

<다시, 다시, 또다시, 강박적인 의문의 반복들>

강부민

도시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거대한 물음 앞에 답을 찾을 궁리를 잠시 멈추고 질문의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보자. 도시의 구성체를 파악하는 것이 왜 필요한가?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주는가? 다시, 도시는 누구의 것인가. 도시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은 각자 자신의 행위를 결정할 수 있는가. 이렇게 생각을 옮겨 도시 안에서 자신의 위상을 스스로 정립한 것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보면 초라한 무기력함이 찾아온다. 재개발로 떠밀려 나가는 사람들, ‘개발제한구역’을 터전으로 삼아 살아갔지만 이제 곧 사라질 철새들과 들꽃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과 그로 인한 감정들. 어느 하나 스스로 결정한 것은 없어도 분명 도시는 모든 존재의 살아감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다시, 질문을 옮겨보자. 우리는 이 도시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새로운 자연계약을 위하여》는 인간중심주의적 시각에서 어떠한 법률적 존엄성을 획득하지 못한 채 지배되고 소유되는 마이너들(재개발 이슈로 곧 사라질 미생물, 토양, 토종 등)을 예술적인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전시이다. 전시가 주목한 부천 대장동은 개발제한구역으로 분류되어 자연적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던, 다시 말해 인간의 개입 없이 비-인간 존재들이 삶을 가꾸던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 땅 위 모든 곳이 그렇듯 이곳 역시 개발을 앞두고 있고, 비-인간 존재들은 어떠한 목소리도 내지 못한 채 별안간 자신의 공간을 잃게 되었다. 작가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시선으로 이 장소를 떠날 모든 것을 기리며 이곳을 기억하기 위한 작업을 선보인다. 이는 도시 속 객체로 규정되며 인간 주체들에 의해 배제되어 정치화되지 못한 행위자들에 주목함으로써 도시 공간이 단수적 주체로서 인간만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공생적 집합체임을 감각하게 만든다. 이러한 관점에서 위 물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 도시 속 ‘우리’는 누구(혹은 무엇)일까. 일상의 감각으로는 미처 느끼지 못한 무언가가 있을까. 그것들은 도시 공간에서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가. ‘작가의 시선’에서 그것들을 어떻게 담아졌으며, 이 전시장 안에서 작품으로서 주체적으로 어떤 행위를 할 수 있는가.

 

전시가 기대고 있는 이론의 뭉치 중 ‘행위자-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 ANT)’은 이 질문들에 유의미한 관점을 제시할 수 있다. 인간과 비-인간 모두 행위능력(agency)을 가진 동등한 행위소(actant)로 보는 이 이론에서 ‘비-인간’은 단순히 자연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기술을 포함해 관계 맺음과 상호 작용 그 자체에 관한 것이다. 반복되는 의문과 의심 속에서 그 방향성을 점검하기 위해 전시를 구성하는 모든 존재를 행위소로 잠시 읽어보자. 이는 작가의 작업이 작가의 손을 떠나 독립적인 행위소로서 공간 안에서 관객과 상호작용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인간중심주의적인 사유로는 다가갈 수 없는 무언가를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끄집어내는 행위 자체에 대한 의문이기도 하다. 현실 속 비가시적인 존재들의 위상을 고민함과 동시에 그에 대한 예술적 시선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차별점들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전시를 만드는 사람들, 전시가 이루어지는 공간, 전시라는 예술적 제도와 그 안의 작품들은 어떤 네트워크를 만들며 행위소로 존재하고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이송 작가는 여행을 통해 자신이 경험한 이미지를 캔버스 안에 담담하게 담아내었다. 기후 위기에 대한 논의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녹색지대의 개발을 바라보며 작가는 우리가 살아갈 장소에 대한 고민을 어두운 색조로 그려내고 있다. 작품은 유인송풍실에 전시되어 그 의미의 농도가 더욱 짙어진다. 유인송풍실은 정화되어 깨끗해진 배기가스를 굴뚝을 통해 외부로 보내는 곳이다. 이곳은 ‘보존 구역’으로 분류되어 아트벙커 B39의 리모델링 속에서도 예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우리 삶에 있어 보존되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도시를 보존한다는 것은 무엇을 보호하여 남기는 것일까. 쇠 파이프의 틀 안에서 보호받는 듯한 작가의 작품은 ‘보존 구역’ 안에서 ‘보존’의 의미를 고민하게 만든다.

 

송차영 작가 또한 대장동에 대한 자신의 인상을 종이 위에 풀어내었다. 체험된 지각 작용을 지각으로 체험된 감정(affection)을 정동으로 고양시키기 위해서는 언제나 작가의 필치와 색채들과 같은 스타일이 필요하다. 펜촉으로 그려낸 대장동의 들판에는 온갖 자연적 행위소들이 마치 꿈의 한 장면처럼 펼쳐져 있다. 눈을 감고 작품 속 개구리가 전시장을 뛰노는 장면, 두루미가 우아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작가가 그려낸 대장동의 풍경은 결국 소멸하지만, 작가의 작업은 거대한 시간의 흐름 안에서 다시 시작할 대자연의 순간을 기다리고 또 찾게 만든다.

 

이원호 작가의 <서식지>는 재개발 예정 지역의 소리를 채집하여 전시장 안으로 가져온 작업이다. 작가는 도시를 거닐며 입으로 소리를 내기도, 스치는 물건들을 이리저리 만지며 소리를 내기도 한다. 또 이곳을 서식지 삼아 살고 있는 벌레 소리와 바람 소리가 작가의 손에 잡히기도 한다. 비단 대장동의 소리뿐만 아니라 이 땅 위 재개발 지역의 소리들이 겹치면서 한국 사회 속 ‘도시’의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상상하게끔 만든다. 작품이 설치된 ‘전기실’은 과거 전기 설비들이 밀집했던 공간으로 현재는 구형 설비들을 철거하고 아트홀로 활용되고 있는 공간이다. 거칠었던 장비들이 빠진 채 매끈해진 공간에서 <서식지>는 규칙과 원칙에 따라 이주가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텅 비워진 곳의 황량한 소리를 내고 있다. 우리의 서식지는 어떤 공간이어야 할까. 매끈한 공간일까 혹은 거칠고 투박해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들에 그대로 머물러야 할까. <서식지>는 이곳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든 결국 사라지고 멀끔하게 정리되는 시간이 도래한다는 것을, 또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사라지는 것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는 조금 씁쓸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같은 공간을 채우고 있는 유비호 작가의 영상 작품 <떠도는 이들이 전하는 바람의 노래> 또한 재개발 도시정책에 의해 비워진 장소와 떠나는 이들을 영상에 담아냄으로써 ‘흔적’이라는 단어가 주는 쓸쓸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작가의 작업은 현실을 반영하고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화된 세계 속 (미약할지라도) 응축된 힘과 잠재적인 삶의 모습을 포착한다. 현실화된 조건과 그 사이에 흐르고 있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아우르는 것이다. 작가가 만들어 낸 세계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감각을, 그리고 이 땅에 대한 개념을 다시 인식하게 된다.

 

조형섭 작가는 재개발 지역에서 버려진 간판을 활용한 작품 <( )_그 곳에 머물를 자유>를 통해 내던져진 자유와 가치 설정의 문제를 다룬다. 어떠한 것이 가치를 획득하고 상실하는 과정은 당연히 다수의 주체들의 행위가 주요 요소로 작동하게 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가치 체계의 형성은 공통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사유화되어 접근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공공의 것을 사유화하는 권력 행사는 이제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찢겨 나간 자유를 다시 이어 붙여 새로운 가치 체계를 우리가 우리 손으로 만들어 갈 수 있을까? 과거 재(ash)를 퍼올려 매립장으로 반출하는 크레인 조종실에서 작품은 꺼지지 않는 재개발의 불꽃이 만들어 낸 자유와 가치의 재를 끌어모은 일종의 추모비를 연상시킨다.

 

이처럼 작가들의 작업들은 각자 독자적이면서 가상적인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지금 현실화된 존재들의 의미와 근거를 되묻도록 만든다. 그 물음은 연쇄적으로 이어지며 끊임없이 새로운 물음을 제기한다. 계속해서 질문에 꼬리 질문들이 덧대어지는 이유는 ‘비-인간 존재에 대한 사유’에 대한 논의가 말 그대로 흘러넘쳐 나는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그것이 낯설고 현실에 적용되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또한 복합적인 사회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단선적이고 수직적인 권력의 행사는 계속해서 의문을 발생시킨다. 우리의 상황은 예술(계) 안팎의 사정으로 계속해서 의문을 가지도록 강제되고 있다. 그렇기에 다시, 이러한 상황에 대해 물을 수밖에 없다. “왜 우리는 의문만을 가질 수밖에 없는가.” 어쩌면 이것이 결국 진정으로 던져야 할 질문일지 모른다.

 

 

김태덕_implicitly explicit – a life after lives_실리콘 수면등, 스테이플_41×30×21cm_2023

 

이능재_낫-thing (공포의 환영)_혼합재료_가변크기_2023

 

이윤석_불확정 회화 01_망사에 아크릴_195×310cm_2023

 

김준서_메타코러스_영상, 모니터, 아두이노, PC_250×800×500cm_2023

 

이동욱_육면체_혼합재료_가변크기_2023

 

 

 

사물

신민경

나희덕 시인은 「새는 날아가고」에서 누군가가 베어 물기 전까지 접시 위에 사과가 놓여 있던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사과는 조금 전까지 붉게 두근거렸어

사과는 접시의 심장이었을까?

사과씨는 사과의 심장이었을까?

 

두근거림을 경험한 바 있는 사과라니, 애초에 사과에게 심장이 실제로 있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이야기이다. 설령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접시의 심장은 왜 사과와 달리 외부에 있다고 추측되는 걸까? 단순히 접시-씨라 불릴 만한 게 없어서? 정말 접시의 심장이 사과가 맞을까? 적어도 객체 지향 존재론자의 성향을 띠는 장 뤽 낭시(Jean-Luc Nancy)의 관점에서 이러한 질문들은 마냥 허무맹랑하지 않다. 그에게 사물들의 실재란 곧 사물들의 심장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마음을 포함한, 광의의 사물 존재들이 지니는 심장.

 

돌멩이 심장(stone heart)이라는 낭시의 표현에서 암시되듯, 사물들의 심장은 늘 가만히 있는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심장과는 거리가 먼, 이상한 심장인 셈이다. 사물들의 심장은 침묵 속에 모든 게 무로 돌려지는 사건의 장소로 기능하기 마련이다. 여느 블랙홀이 그러하듯, 그들의 심장은 있음 그 자체만으로도 그들의 실재를 총체화하려는 우리들의 지적 노력을 허문다. 그리고 이는 우리의 사유 과정 전반이 그들의 심장이 선사하는 중력에 내맡겨진 채 그대로 경화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생각이라는 사물의 심장은 로고스의 논리에 의해서는 꼭꼭 숨어버리고 마므로.

 

현실에서 사과와 접시의 심장은 엇비슷하다. 접시의 경우 그 심장성이 우리의 언어로는 미처 옮겨지지 않아 조금 더 낯설 뿐. 시에 등장하는 접시의 심장 또한 우리가 바라는 역동적인 움직임은 아닐지라도 주변 사물인 사과와의 닿음 여부와는 무관하게 나름의 방식으로 접시 내부에 유유히 들어앉아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은 미네랄적 외피에 의해 꽁꽁 싸매진 알맹이와 같아서 피상적인 접촉만으로는 그 있음이 건드려지지 않는다. 시로 다시 돌아가면, 앞서 언급된 구절들 다음에는 아래의 내용이 나온다.

 

둘레를 가진 것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담겼다 비워지지

심장을 잃어버린 것들의 박동

너는 들어본 적 있니

 

어떤 사물이 물질성을 지닐 때면 마치 실재적인 것만 같다. 하지만 어떤 사물이 실존한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일상에서 마주하게 되는 사물들은 대개 우리 주위를 존재적으로 흐릿하게 맴돌고 있을 확률이 높다. 가령 어떤 사물이 객체, 즉 도구적 쓰임의 대상일 때에는 사물 본연의 자태로 있는 게 아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다시 순수한 물자체로 돌아가지기를 염원하는, 마법에 걸린 개구리 왕자 상태에 불과하다. 그러니 무언가를 보다 사물 친화적인 시선에서 객체가 아닌 사물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금세 마법에서 풀려나 각자의 심장을 매개로 서로의 마음이 슬며시 맞닿아질지도 모른다.

 

이번 전시 제목 말마따나 새로운 자연계약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요즘이다. 미적 경험의 측면에서 전시장은 사물과 관람객 간 새로운 자연계약이 맺어지는 회색 생태계(Grey Ecology)와 같다. 전시장에서 실시간으로 구현되는 생태계는 재개발 이슈로 인해 언젠가는 해체될 부천 대장동의 논밭 생태계를 닮았다. 이곳에서 우리는 서로의 찰나에 그저 자기 자신으로서 스며들 기회를 얻는다.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단어 사이에 빗금이 아니라 이음표가 그려지는 순간이다.

 

김태덕은 완제품 형태의 무드등들을 해체 및 재성형하는 과정에서 그것들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이제 전기실은 이 생명체들이 거주하기에 적합하도록 조성된 작은 지구이자 그동안 인간들의 필요에 의해 밀려났던 사물 존재들을 위한 지상낙원이 된다. 이능재는 ‘은혜를 갚는 두꺼비’라는 전래동화에서 모티브를 얻어 농사 도구인 낫을 커다란 지네 존재의 신체 일부로 편입시킨다. 이는 인간의 번영을 이유로 지금처럼 수풀들을 무분별하게 베어버린다면, 도구 존재이던 낫이 불현듯 치명적인 독지네로 변할 수도 있다는 섬뜩함을 관객들에게 남긴다.

 

이동욱은 소외되는 일이 잦은 주변부적 존재들에 자주 눈길을 준다. 평소 실용적이지 않은 사물들을 수집하는 것이 취미인 작가는 이번에는 식물에서 추출한 기름을 토대로 물 분자라는 또 다른 사물의 자유로운 몸짓을 이끌어낸다. 이윤석은 얇은 천 위에 무수히 많은 안료 분자들을 안착시킴으로써 미지의 연속체적 작품 존재를 탄생시킨다. 안료 분자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두께감은 그 작품 존재 특유의 피부층을,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나부끼는 올들은 가상의 솜털을 은유한다. 김준서는 사각 프레임 속에 26인의 메타휴먼을 위치시킨 뒤 관객들에게 그들이 합창하는 모습을 선보인다. 누군가에게 멜로디가 감각되는 동안 이질적인 두 개체들의 사회는 시시각각으로 포개어진다.

 

낭시식 사물생각(thought-thing)을 전시장 내에서 자연계약이 원활히 성립되게 하는 인간(관람객)과 사물(작품) 사이의 공통의 코드로 제안해 본다. 여태껏 겪어보지 못한 방식으로 의식에 내재된 사물성이 새롭게 꺼내어지고 싶다면, 잠시 이성의 인간 중심적 작동을 최대한 멈추어 보자. 의미 부여, 해석 등의 행위를 유보한 채 작품이라는 사물들 자체의 있음에 우리들의 마음을 오롯이 노출시키다 보면 어느새 우리들의 생각은 그들 내면의 돌멩이 심장, 이른바 사물-씨와 공명하고 있을 테니.

 

* 해당 리뷰가 작품 감상에 있어 이해를 돕는, 시집 말미의 해제와 같기를 바랍니다. 어느 날 본 전시에서 만난 사물 존재 중 하나가 문득 생각나신다면, 리뷰 속 낱말 존재들 너머에도 나름의 심장이 자리하고 있음을 같이 기억해 주시기를.

 

 

 

전시연계 프로그램

렉처 퍼포먼스

10.13(금)

1st 15:00-16:50 채효정(정치학자)

“기후위기 시대, 전혀 다른 정치적 상상력을 위하여”

2nd 17:00-18:50 김병권(기후경제 디지털 경제 정책 연구자)

“기후를 위한 경제학, 지구 한계 안에서 좋은 삶의 모색”

 

10.14(토)

1st 13:30-15:20 최유미(수유너머 104 연구원)

“오이코폴리틱스”

2nd 15:30-17:20 강금실(경기도 기후대사, 지구와 사람 이사장)

“지구를 위한 변론”

 

장소 : 부천아트벙커B39 스튜디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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