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의 화두로 전면에 떠올랐던 ‘일상’의 화려한 춤사위는 우리의 시각을 포획하기에 충분했다. 흑백으로 점철된 어두운 시기였기에 사적인 담론은 공적이면서 거대한 담론의 그늘에 놓여야 했다. 그러기에 늘 우리와 함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빛을 보지 못했다. ‘일상’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 거릴 때, 사람들은 마치 새로운 것이 출현한 듯 열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열풍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일상’을 검토해 본다면, 우리가 정작 매혹되어 지금까지 끌고 온 것은 ‘화려한’ 춤사위였지, 화려한 ‘춤사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우리는 ‘일상’에 대한 표면적인 그리고 맹목적인 접근만을 시도한 것이다. 일상으로 모든 것을 규정했으며, 모든 것이 일상인 듯 살아왔다.
나는 너를, 너는 나를
김현정 작업의 출발점 역시 일상적 풍경이다. 자신의 생활 주변에 있는 소소한 사물들, 장소들이 그의 작업 전면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과연 지금 자신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일상이라 할 수 있는가? 주변에 있다고 모든 것이 나에게 유의미한 존재인가? 그렇다면 이러한 소소한 것들이 어떻게 나의 인식 체계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는가? 이러한 질문을 내재하고 돌아보니 정작 자신의 주변에는 일상이라 호명 될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기에 김현정은 새로운 시각으로 일상을 볼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일상이라는 거대한 몸체에 돋보기를 들이대듯이 일상의 일부를 구체화 시켜 대면하는 것이다.
화면의 중심에는 그와 대면했던 사물들이 자리한다. 사물의 주변 풍경은 형체는 가지고 있으나 색점의 반복을 통해 사방으로 흩어진다. 마치 그곳에는 작가와 대면해 있는 그 사물들만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당신의 두 눈>은 횡단보도 맞은편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도로에는 차가 지나가고 거리에는 사람이 걸어 다닌다. 또 다른 사람들은 횡단보도를 건너려 한다. 그리고 그 뒤로 여러 상점들이 보인다. 그러나 그것들은 너무나 당연한 풍경이지만, 단지 그곳에 있을 뿐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무의미의 존재이다. 즉 그(들)것은 당신의 두 눈에 들어오지 않는 흩어지고 있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통행의 불편함을 제공하여 거리의 천덕꾸러기처럼 보이는 노란색의 장난감 기계만이 명확하게 화면을 장악하고 있다. 그것이 <당신의 두 눈>이 투사하고 있는 지점이며, 사물이 존재로서 의미를 가지게 되는 지점이다. 이러한 작업의 형식은 김현정의 다른 작업에서도 이어진다. <파란 바람이 부는 날에>의 우편함, <꿈속의 너>의 달리는 버스, <눈물이 넘치도록>의 송수관, <순결하고, 강하고, 아름다운..>의 오토바이 등 그의 작업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흩어지는 풍경의 중심에 명확한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
흩어지는 풍경 속에서 명확하게 떠오른 이미지는 일차적으로 작가의 시선이 그곳에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사물의 입장에서 본다면 누군가가 자신을 호명함으로써 아무런 의미 없이 흩어질 가능성을 가진(여타의 배경처럼) 사물이 ‘존재적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모든 것들이 흩어지고 사물과 나만이 남는 공간에서 자신을 규정해주는 것은 바로 자신이 존재적 의미를 부여한 그 사물에 의해서이다. 나는 너를 부르고 너는 나를 부르는 이 과정의 반복은 상호간에 존재적 의미를 부여하는 순환과정이다. 그렇다면 결국 사물과 나 사이에 남는 것은 물질적 요소가 아닌 비물질적 요소 즉, 상대를 인식하는 생각의 파동들뿐이다. 이것이 존재하지 않는 한 견고해 보이는 물질적 요소들은 어떠한 의미도 가지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빈틈 하나 없이 견고해 보이는 물질적 세계를 주관하는 비물질적 요소의 힘이다.
김현정은 이 지점에서 일상의 사물들과 대면하고 대화를 나누며 이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많은 동시대 작가들처럼 그의 시작은 일상이었지만, 그가 걸어가고 있는 길은 물질적 요소로 가득한 자신의 일상을 의심하며 비물질적 요소로 자신의 일상을 재규정하는 것이다. 김현정이 만들어낸 이러한 낯선 일상의 풍경은 단순히 ‘일상’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세계를 인식하는 새로운 시도이다. 이러한 면에서 그의 작업은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미학적 성과가 있다. 그러나 ‘흩어지는 것’과 ‘명확한 것’이라는 이분법의 전면 배치는 어쩌면 그 분명함만큼이나 쉽게 식상할 수 있다. 그러기에 그의 끊임없는 실험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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