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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김 〈삼정동 르뽀: 개 닭 보듯〉 양반김 〈삼정동 르뽀: 개 닭 보듯〉 양반김 〈삼정동 르뽀: 개 닭 보듯〉 양반김 〈삼정동 르뽀: 개 닭 보듯〉 양반김 〈삼정동 르뽀: 개 닭 보듯〉 양반김 〈삼정동 르뽀: 개 닭 보듯〉

양반김 〈삼정동 르뽀: 개 닭 보듯〉

양반김

2015.03.18(wed)-04.08 (wed)

1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가 순위를 다투며 깜빡깜빡 인다.

사건사고는 TV속 뉴스 앵커의 움직이는 입술사이로, 혹은 각종 텍스트 몇 자로 접하게 된다. 영화나 소설을 보듯 실재감은 사라지고 무미건조한 태도로 마우스 휠 한번 돌리는 행위 혹은 ‘아이고 어떡해’ 라는 동정어린 한숨소리 한마디면 잊혀 져 버린다. 이는 우리가 사건. 사고를 마주하는 자세이다.

 

‘현재 이곳에는 22마리의 개가 있으며, 회사 측은 동사를막기 위해 견사에 비닐과 스티 로품을 씌워 놓고 있지만 한기를 막지는 못하고 있다’

– (부천=연합뉴스)기사입력 2006.01.05 기사 중 일부 발췌

 

양반김은 부천 삼정동이라는 공간을 정한 뒤 그 곳에 대한 포털 사이트에서 ‘얼어 죽은 개 사건’을 찾았다. 이 사건을 배경으로 미디어로만 접하고 지나가버린_지나쳐버린 사건을 텍스트를 떠나 머물다가 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현 시각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대할 때 역시 ‘그 순간’에만 관심을 표하거나 스쳐 지날 정도로 무감각하여 방관적 태도를 일관하는데 얼어 죽은 개 _9 년전 의 사건을 양반김의 예술적 언어로 현재 지금 시점으로 다시 삽입하려 한다. 원래의 사건과 의미는 시간 차 에 의해 다소 왜곡되거나 변질될 수 있음을 염두 해본다.

‘정교한 취재, 생생한 리얼리티. 사건을 입증하는 단서’ 는 이번 [삼정동 르뽀: 개 닭 보듯이] 전시에서 찾아 볼 수 없는 태도이다.

이번 전시의 핵심적 특징은 과거를 파편적으로 참조하는 것, 시간의 왜곡, 장소특정성 등이다. 2015년에 우리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2009년 사건을 2주 동안 아트포럼리와, 삼정동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외쳐진다.

누군가에게는 한낱 개일 뿐일 수 있고 현재성이 없다고 느끼는 관객에게는 무의미하게 이해될 수도 있다. 관객들에게 감정이입을 기대하거나 유도할 생각은 없다. 사라지는 사건을 대하는 우리의 익숙한 망각을 건드려보려 한다.

이번 전시의 시작은 삼정동이라는 양반김의 새로운 작업공간을 탐구하려 하였고 그 탐구의 시발점을 삼정동 속에서 실제 일어난 사건을 배경으로 하여 사건 현장을 재구성하듯이 설치작업과 영상작업으로 펼쳐 보인다. 지나간 사건은 현재로 넘어와 관객이 다른 방식으로서의 체험을 요한다. 관객은 사건 현장을 관찰하듯이 이 난해한 작품의 실마리를 찾아다닌다면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지도 모른다.

전시의 소제목으로 명기된 [개 닭 보듯] 이라는 속담은 서로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고 있는 사이임을 비유적으로 이루는 말이다.

애견파크 개 사건의 해결점인 무책임함은 남루한 비닐집을 풍경으로 재구성하여 보여 질것이다.
캉디드, 한없이 가벼운 한없이 낙관적인

-예술과 실천행위 사이에서, 양반김 론

 

다다이스트들이 1차 대전 이후 파국의 상황에서 부르주아 문화의 모든 기준에 대해 반기를 들며 그들이 택한 대표적 유효 전술은 즉흥성과 허무주의적 태도였다. 심지어 무의미한 광대극으로까지 치부되었던 이들의 행위는 ‘문화와 예술의 이상’을 우스꽝스러운 코미디처럼 조소했다. 소리 지르고 웃고 손짓발짓하고 동물 울음소리를 내거나 무희처럼 춤을 추기도 하는 그야말로 맥락없는 재례의식으로 보이는 그들만의 히스테리컬한 연출방식은 보편적 표현언어를 구축하기 위한 그들만의 시도였다.
양씨와 김씨가 듀오를 이룬 ‘양반김’의 작업방식은 여러모로 다다이스트를 닮아있다. 카페에서 수다를 떨면서 우연적으로 주제를 발견하고 이를 시각적으로 어떻게 구현해 낼 것인지를 즉흥적으로 구상하고, 주변 지역을 무턱대고 배회하며 얻어걸린 재료들을 이용해 퍼포먼스를 벌이는 점은 분명히 일정 부분 다다이스트들의 태도를 전유한 것처럼 보인다. 이들의 퍼포먼스는 70년대식의 신체적 퍼포먼스-물리적 공간의 리듬에 의한 신체적 감응을 내세우는 플럭서스식의 퍼포먼스-라기보다는 무대 위의 개그맨들이 벌이는 한없이 가볍고 유쾌한 상황극에 가깝다. 종로의 젊음의 거리에 위치한 스타벅스에서 양반김을 인터뷰했을 때 그들은 언뜻 주류 퍼포머들의 언사와 몸짓에서 나타나는 쓸데없는(!) 진중함에 반감을 내비쳤었다. 그것은 행동주의로 출발한 퍼포먼스가 화이트큐브의 내부에 들어와서 자기 통제로 규율을 습득하며 주류미술에 포용되었던 지난 역사에 대한 반성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날 우리의 대화는 취기 오른 술자리의 잡담들처럼 대상만을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같은 자리에서 계속 공회전했다. 그러나 양반김의 퍼포먼스가 반드시 미술사 내에서 퍼포먼스가 이룬 지난한 역사에 대항하는데 지향점을 두었다고 할 수는 없다. 역사 이후의 예술이 자신의 존재를 묻는 예술과 역사를 인식하고 있는 예술로 나뉠 수 있다는 아서 단토의 주장에 의거하여 양반김의 작품들을 심판대에 세운다면 양반김은 물론 전자에 해당할 것이다. BOXXBOX에 실린 패러디 작품들이나 문래예술공장의 MEET PROJECT에 선정된 ‘사연은 이러하다’, 지역연계 전시 <옥상의 정치>의 일환으로 문래동의 옥상에서 이루어진 현수막 퍼포먼스 등 다수의 작업들이 주로 문래동 일대의 후미진 골목이나 풍경을 담고 있고 이들이 사용하는 재료들도 문래동 지역에서 배출된 쓰레기들을 주워 모은 ‘남루한 오브제’들이지만 이들이 문래동의 특정 건물의 옥상에서 무엇인가를 벌이거나 문래동의 어느 동네를 배회하면서 촬영을 한다고 해도 그것을 반드시 장소특정적 작업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이들의 작품에서 문래동은 어떠한 의미나 역할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문래동은 단지 북경 레지던시의 경험을 마치고 한국에 온 양반김이 가장 먼저 정착했고 여러 작가들을 만났던 장소 이외의 의미는 없었다. 따라서 그곳은 부산이 될 수도 있고 종로의 어느 골목이 될 수도 있었다. 우리가 문래동에 대한 선험적 지식을 섣불리 양반김의 작업에 대입하려는 태도를 지니고 작품을 바라본다면 양반김의 작업은 가난한 젊은 예술가의 지리멸렬한 일상적 놀이로밖에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양반김의 작업은 스스로가 포트폴리오 앞면에 밝힌 작업 키워드 “만담/액션/풍자/장소/남루한 오브제/일상적 소재/수다” 작가의 포트폴리오 전면에서 발췌
로만 치부되기에는 아쉬운 점이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이들이 아서 단토가 언급한 ‘역사를 인식하고 있는 예술’-그것이 주류이든 비주류이든-의 틈새에 자신의 존재를 세우는 방식이 매우 독특하기 때문이다. 양반김의 행위는 으레 비판적 행동주의로 나아가는 젊은 미술가들이 그렇듯 비판의 칼날이 주류 미술계의 태도에 향하는 것도 아니다. 이들이 비판하는 부조리는 주류미술계를 비난하면서도 속으로는 주류미술계에 발을 딛고 싶은 욕망을 감추고 이들을 점점 닮아가는 비주류 미술가들의 태도와 예술가적 행동양식이다.

1. 허세예술담론, 혹은 캉디드의 유예된 삶을 바라보는 이중적 시선

볼테르의 계몽주의 소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의 주인공 캉디드는 물신의 세파 속에서 이리저리 치이는 비참한 군상들을 마주한다. 캉디드는 그 부조리한 상황 앞에서 고뇌에 빠지지만 해결할 수 있는 뾰족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대신 타인에게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야한다는 타인의 충고에 봉착하게 된다. 캉디드는 낙관주의와 회의주의 사이에서 어떠한 입장도 취하지 않고 소설을 끝을 맺는다. 이 소설에는 진리를 사유할 수 있는 주체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는 계몽주의적 관점과, 주체가 타자에 의해 형성되었고 그간 자명하다고 믿어오는 모든 것들이 사실 습관적이거나 관념적으로 맹신되어 온 신화에 불과하다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적 반계몽주의 사이에서, 계몽주의의 실패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관주의 사이에 놓인 캉디드의 유보적 태도를 암시하고 있다. 단적으로 말해, 오늘날 사회적 행위자로서의 계몽을 요구하며 미술계 안팎을 향해 목소리를 내고 있는 행동주의 미술가들은 미적기준을 충족시키는 예술작업과 사회적 행위자로서 작가라는 위치, 그리고 정치적 주체로서 요구되는 행동주의라는 갈림길들 사이에서 정확히 캉디드의 상황에 처해있다. 양반김의 허세예술담론은 가벼운 블랙 코메디와 패러디에 가까운 형식을 취하면서 자본과 예술이 분리될 수 있다고 믿는 (자칭) 순수 예술가들의 허세에 아니꼬운 시선을 던지고 있다. 귀가 잘린 김씨와 바게트 빵을 머리에 꽂은 양씨를 내세워 벌이는 설전은 순수예술이나 상업예술 모두가 지니고 있는 허세를 폭로한다. 그 밖에도 또래작가들의 허위의식이 드러나는 SNS의 글을 차용하여 조롱한 ‘러브 액추얼리’나 된장녀의 근성을 비꼬는 똑똑한 여자 증후군 역시 이와 유사한 양반김의 비판적 태도를 보여준다. 양반김이 사용하는 비판적 언어의 형식은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은 양식에 따른다:

B급 지향⦁대충 제작한 홈비디오 형식⦁ 대화는 거진 나오는 대로 내뱉기⦁소통을 담보로 한 대화라기보다는 각자의 웅얼거림에 가깝기⦁원서를 쌓아놓고 밑줄을 긋거나 각종 이론서적들을 참조하는 작가들과는 달리 잡담에서 출발하고 즉흥적으로 실천에 옮기기⦁할 수 있는 한에서 해보기⦁뭐든 해보기⦁일단 해보기⦁산발적이고 거칠어도 신경쓰지 말것

이쯤 되면 이들의 작업은 산통을 겪은 작가의 산물이 아닌 단순한 두 친구의 ‘놀이행위’에 가깝다. 하위징아에 의하면 문명사를 만들어 낸 존재는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라는 인간형이었다. 인간의 본원적 특징이라고 해석되는 호모 루덴스는 노동으로 환원될 수 없는 ‘놀이 행위’를 하는 인간이다.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시대의 상징인 사유하는 인간 호모 사피엔스가, 그리고 종교적 세계관이 막을 내리고 산업혁명 이후 세속적 세계가 열리는 20세기 초에는 막스 프리슈(1911~1991)의 소설에 등장하는 노동하는 인간 호모 파베르가, 하위징아의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의 개념이 각각 시대의 상식을 반영하는 인간상으로 대두되었다. 노명우,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을 꿈꾸다』, 사계절 출판사, 2013, p.18~26
계몽주의 시대는 사유하는 주체가 필요했다. 중세에서 근대로 옮겨 가는 근세 시기에 싹튼 인간은 지식을 얻음으로서 동물과는 구별되었다. 산업혁명이후 근세를 완전히 벗어나 근대적 개념의 국가가 형성되었을 때는 경제발전과 기술발전이 필요했다. 따라서 ‘감정’은 소거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안고 기계처럼 근면성실하게 움직이는 ‘노동’의 자세가 요구되었다. 하지만 호모 파베르들은 근대 국가의 팽창시키고 자원(경제력)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을 과열시켜 결국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한편,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는 노동에 가려져 격하된 놀이를 재평가한다. 호모 루덴스는 철저하게 자본주의적 인간모델인 호모 파베르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양반김의 허세예술담론이 잡담이라는 느슨한 형식을 통해 비꼬듯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오늘날 예술에 요구되는 본질은 절제된 ‘사유’도 과업을 이루려는 장인정신에서 비롯된 ‘노동’도 아닌 순진무구한 ‘놀이’일까. 양반김은 그간의 미술교육제도들이 쌓아온 도제식 수업과 ‘예술적’ 행위라는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방식으로서 ‘놀이’를 선택했고, 놀이방식을 통해 예술-(일상)행위를 경계를 의문시하지만 이러한 이분법이야말로 되려 자신들의 ‘놀이’가 ‘예술적’ 행위로 읽혀져야 한다는 역설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계몽의 실패는 (계몽의 대상이 제도 그 자체이든 제도권을 욕망하는 작가들이든 간에) 살아남기 위한 전략으로서 작가들은 거의 강제적 자기검열과 행동양식들이 결정된다는 점, 한편으로 비판적 시선을 가하는 자들은 그들이 속한 영역을 비난하면서 정작 자신을 그들로부터 거리를 두어 배제시키는 (이 또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을 취함으로써 그들이 실천하는 비판의 정합성을 잃고 비판적 시선 자체가 비제도권 작가의 생존 전략으로 받아들여진다는 데 위험이 늘 내재한다. 단언하자면 (이제) 오늘날 계몽의식의 잣대는 좁디좁은 장(영역)에서 생존의 불안을 껴안고 살아가는 미물들의 밥그릇 각축장 위로 옮겨지고 말았다.
아도르노가 에세이 『미니마 모랄리아』를 통해서 자조적 어조로 밝히고 있듯이 이제 삶이라 부른 것은 어떤 자율성이나 독자적 실체도 지니지 않은 물질적 생산과정의 부속물이 됨으로서 사적 영역이나 단순한 소비의 영역으로 변했다. 직접적인 삶에 대한 진실을 경험하고자 하는 사람은 삶의 소외된 모습과 개별 실존의 가장 내밀한 국면까지를 규정짓는 객관적 힘을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아도르노, 『미니마 모랄리아』, 도서출판 길, p.13

아도르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실존을 올바른 삶의 부서지기 쉬운 이미지로나마 만들려 애쓰는 사람들은 대세를 받아들이는 ‘순응’ 대신 ‘내적 저항’으로서의 글쓰기를 ‘삶’의 방편으로 삼는 인간으로 바라보았다. 위와 같음
물론 그가 말하는 이 인간상에는 지식인 전체가 함축되어 있고 은연중에 아노르노 자신까지도 포함시킨다.

2. 텍스트 디자인을 생존의 목소리로 전환시킨 현수막 퍼포먼스

2012년과 2013년들의 작업들이 주로 패러디와 다소 직설적인 비판에 천착했다면 2014년 이후 양반김의 작업은 완전히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양반김은 기존의 사변적 경험에서 출발하는 비판적 발언이 다소 사적영역에서 이루어졌었다면, 공공의 영역으로 나가 보편적으로 통용될 일상 경험과 소재를 선택하여 변형시키는 방향으로 전환점을 꾀했다. 수잔 레이시는 참여적인 공공미술 비평의 문맥을 짚은 저서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 지형그리기』에 실린 에세이 ‘논쟁 영역: 공공미술에 대한 비판적 언어를 지향하며’에서 미술가와 사회적 행위자의 이중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동시대의 참여적 공공 미술가를 언급한다. 이 글에서 그가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이 갖는 상호작용의 특질을 도식화한 도표들에 따르면 미술가들은 사적영역에서는 경험자로서의 미술가이며 공공적으로는 행동가로서의 미술가이다. 그 중간에는 보고자로서의 미술가와 분석가로서의 미술가가 자리한다. 저자에 따르면 미술가는 언제라도 이 역할들의 사이를 이동할 수 있다. – 수잔 레이시 저, 이영욱 옮김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 지형그리기』, 문화과학사, 2010, p.245 참조
작가의 입을 통해 직접 발언을 하기보다는 시각적 형태로 제시하려는 재-현(re-presentation)방식을 택한 셈이다. 2014년 문래동의 옥상에서 시작되어 여러 장소로 이동하며 선보인 현수막 퍼포먼스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양반김의 대표작으로 언급될 이 프로젝트는 현수막을 수집하고 각각의 현수막 광고에 쓰인 단어들을 잘라 이어 붙여 손수 빨래를 하며 현수막의 분절된 텍스트들을 목소리로 세탁시킨다.
현수막의 텍스트 디자인은 눈에 띄기 쉬운 폰트와 색을 사용한다. 그 내용은 무엇이든 간에 형식은 광고 디자인의 규칙을 그대로 따른다. 보색으로 눈에 띄기 쉽게, 굵직한 고딕체로.
양반김은 현수막 광고의 텍스트들을 시장에서 상인들이 손님에게 외치는 ‘목소리’로 여긴다.
신자유주의 시장에서 다중경쟁체제 틈으로 몰린 현수막의 주인들은 저마다 눈에 띄기 위해 목소리를 높일 수 밖에 없다. 현수막의 광고 텍스트들은 더욱 굵고 원색으로 강렬해진다. 모든 현수막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때문에 오히려 개개의 목소리들은 전체의 웅성거림 속에 묻히고 만다. 흥미롭게도 현수막의 광고 텍스트 디자인들은 자신의 예술적 개성을 대변하기 위해 외적 치장에도 힘껏 애쓰는 젊은 작가들, 그러나 이 차별전략이 모두들 똑같아져 개별 개성이 묻히고 마는 아이러니한 상황과 무척이나 닮아있다. 예술성을 외형에 드러내는 행위 역시 상품 포장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양반김은 동네에 버려진 현수막들을 하나씩 주어모으기 시작하지만 늘 그렇듯 특별한 규칙은 없다. 지나다니다 눈에 띄거나 상태가 양호한 현수막이 주로 선택된다. 이렇게 현수막들을 주어모은 다음 현수막 위에 씌여진 단어들을 잘라내고 서로 다른 현수막에 쓰여진 단어들을 조합하여 이어붙인다. 이런 과정으로 완성시킨 현수막을 새것처럼 보이기 위해 빨래까지 하는 행위는 언뜻 제의적으로 비춰지기까지 한다. 분절된 텍스트들은 일련의 공정을 거쳐 광고성을 (잃어)버리고 새로운 목소리로 재탄생한다.
이 현수막 퍼포먼스는 옥상민국 전에서 처음으로 선보여졌다. 2014년 대안공간 이포에서 열린 옥상민국 전은 5개 광역도시에서 동시다발로 열리는 <옥상정치- 지역연계 예술프로젝트>의 서울전이었다. 지역협업전시 <옥상의 정치>는 전시와 출판이 함께 이루어졌고 그 결과물은 단행본 『옥상의 정치』(고영란 외 저, 갈무리, 2014) 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안녕치 못하는 세상에서 예술가들이 스스로의 삶을 현재의 사회 속에서 투영하고 실천한다는 목적을 둔 이 협업 프로젝트는 예술가들의 삶을 보여주는 행위 자체가 세상의 틈과 균열을 까발리고, 왜곡되고 낯설어진 모습을 들추어내는 행위가 되었다. 이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이 실천가로서 자신들을 정치적 주체화할 수 있었던 것은 제각기 부서지기 쉬운 존재로서의 자각과 자기선언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양반김 역시 2010년 북경 레지던시 시절에 형성된 ‘무명의 학생 작가, 하위주체로서의 여성, 자본주의 사회에서 철저히 배제된 가난한 예술가’ 라는 자기인식이 전제했다.
과거의 젊은 세대들이 기성세대들의 권력과 당당히 맞서거나 전적으로 순응하는 태도를 보였다면, 이 전시에 참여한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훨씬 더 영악해졌다. 이들은 자신들의 부서지기 쉬운 삶을 방어하기 위해 ‘순응’ 대신 이제 ‘내적 저항’을 방편으로 삼는다.
젊은 세대들은 기성의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나려고 할수록 점점 기성세대를 닮아가지만 달리 살 방도가 없기 때문에 게임에 동참해야하며, 달리 살 수 있는 사람들은 동참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바깥에 있어야만 한다. 이런 상황에서 양반김의 ‘놀이’는 젊은 세대들의 내적 저항방식을 지지하는 강력한 조력자다.
세태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유지한 채 세상을 관조하는 시선을 무심하게 던지는 소위 먹물 지식인들에 반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행동하는 실천가들로부터 우리가 얻은 힘은 체계의 그물망이 더욱더 촘촘해져가는 상황에서 어떤 진정한 출구도 없고 출구에 대한 희망도 잃어버린 채로 체계의 속박에서 탈주하려는 ‘헛된’ 시도들만 무한히 반복하는 현대의 ‘개인’인 자신의 입지를 재확인하며 다시 한번 좌절하지만, 끝까지 자신을 연민하지 않고 입석표처럼 당당한 관계 김애란, 『달려라 아비』, 창비, 2005 p.16
를 정립해내는 캉디드들의 낙관적 힘일 것이다.

■이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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