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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가인 〈사는 게 왜 이렇게 재미가 없냐〉 박가인 〈사는 게 왜 이렇게 재미가 없냐〉 박가인 〈사는 게 왜 이렇게 재미가 없냐〉 박가인 〈사는 게 왜 이렇게 재미가 없냐〉 박가인 〈사는 게 왜 이렇게 재미가 없냐〉 박가인 〈사는 게 왜 이렇게 재미가 없냐〉

박가인 〈사는 게 왜 이렇게 재미가 없냐〉

■ 전 시 명 : <사는 게 왜 이렇게 재미가 없냐>

■ 작 가 명 : 박가인

■ 전시기간 : 2019. 06. 10. () – 07. 05. (금)

*10:00-18:00 / 일요일, 굥휴일 휴관

■ 오 프 닝 :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 장 소 : 대안공간 아트포럼리

■ 문 의 : www.artforum.co.kr T.032_666_5858

■ 기 획 : 대안공간 아트포럼리

■ 아트디렉터 : 이훈희

■ 큐레이터 : 고주안

■ 후 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박가인_사는 게 왜 이렇게 재미가 없냐_인스타그램을 이용한 사진전시_2017~9

 

무미예찬, 재미가 없으면 재미있게 살자

■ 김남수(무용비평)

 

“밖으로 나가시던 아빠가 문턱에서 갑자기 휙 뒤돌아 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거에요. “아, 왜 이렇게 사는 게 재미가 없지?”” (작가 박가인, 인터뷰 중에서)

 

박가인 작가는 삶의 재미를 잃고 소파에서 뒹굴뒹굴 하는 아빠가 있다. 이 아빠는 과거 박정희 근대화 시절 산업의 역군이었고, 지금은 태극기 부대와 동반자적 관계에 있지만, 대체로는 심드렁한 채 소파의 품 속에 안겨서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소극적 저항 쪽을 택한다. 박가인 작가는 아빠가 이 살아가는 것의 재미를 실제로 잃으신 것인지, 아니면 삶의 재미가 없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알리바이로 작동하는지 – 가령 백남준은 이런 수법을 썼다. 독일의 어느 방송국에 갔더니, 사람들 표정이 재미없어 하는 게 역력하더란다. 그래서 “아, 재미없어! 재미있게 일하자.” 그랬더니 사람들이 파안대소 하면서 갑자기 재미있어 했다는 것. – 즉 그 알리바이를 등에 업고 실제로는 은근히 재미를 보시는지 정확히 알 길은 없지만, 어쨌든 마치 마천루 배경으로 6시간의 잠을 청하는 사람이 등장하는 앤디 워홀의 영화적 감흥 – 무미한 감흥 – 처럼 ‘내용 없는 시간’을 일구고 있는 아빠의 일상을 매일 사진으로 기록하면서 그 기록물을 현대의 가장 일반적으로 전시할 수 있는 인스타그램에 등록한다. SNS라는 초연결은 이미 우리에게 무감각한 일상의 일부지만, 이 박가인 작가의 사진 속에 차르르 두루마리처럼 펼쳐지는 아빠의 초상은 그야말로 무감각과 멍때리기의 아바타로서 거기 그렇게 있다. 인스타그램은 연속되는 사진들의 이미지가 디스플레이 되기 때문에 소파에 안겨 눈감고 잠은 청하는 듯한 거의 속옷 한 장에 의지한 육신이 온몸으로 “아, 재미없다!”라고 무언의 웅변을 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재미없음의 노년 남자의 육신이 아무런 단서 없이 나열되는 흐름이 이상하게도 슬슬 재미가 생겨난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박가인_사는 게 왜 이렇게 재미가 없냐_인스타그램을 이용한 사진전시_2017~9

 

 

박가인_사는 게 왜 이렇게 재미가 없냐_인스타그램을 이용한 사진전시_2017~9

 

“네 마음이 무미한 초탈함 가운데 움직이게 하며 네 생명의 숨결을 일반적인 무차별성과 합하라.

만일 네가 사물의 자발적인 움직임과 연합하여 네 자신의 개인적인 선호를 중시하지 않게 되면, 온 세상이 평안해질 것이다.” (장주)

 

실제로 초탈하고 무차별한 이는 박가인 작가이다. 그는 『육일봉』 전시에서 최장원 작가를 비롯한 다수의 수상쩍은 동시에 개성 강한 작가들과 의기투합하여 도시 한복판의 슬럼가로 퇴락해가는 리듬의 한 켠에서 뭔가 정체가 불분명하고 실체가 뚜렷하지 않은 세계를 펼쳐보였다. 그 전시의 모티브가 되는 것은 도시의 반제품과 폐품으로 전락해가는 상품경제의 부산물들, 소위 예술가들의 자본주의 기식자 전략의 주요한 매개물들로 시간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아카이브 작업이었다. 아카이브의 무차별성, 혹은 초탈성은 그 예전 을지로 거리와 종로 5가 너머의 오래된 동시에 쓸모없는 골동의 영역을 무아의 경지로 이끌어들였던 최정화 작가의 그것에 필적하는 마음의 크기와 용적을 짐작케 한다. 사실 『육일봉』 전시는 이러한 아카이브 아닌 아카이브, 모든 것이 예술의 잠재성을 저밀도로 품고 있지만 비예술의 상태로 머물고 있는 아카이브를 조금씩 조금씩 내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작가의 말을 믿는다면, 그것은 전체를 활짝 만개시킨 타입은 아니었다. “호랑이 꼬리만 보여주는 것이 더 무섭다.”(백남준) 라는 격언처럼 박가인 월드의 호랑이 꼬리가 아무도 장소 자체로서의 슬럼가적 성격을 주목하지 않는 곳을 마당의 비질처럼 슬쩍슬쩍 쓸기 시작하는 전시였다. 그는 오래된 미래의 선취된 타읿으로서 제2의 최정화가 될 수 있을까. 이런 말이 실례일 수도 있지만, 박가인 작가는 미소짓는다.

 

박가인_사는 게 왜 이렇게 재미가 없냐_인스타그램을 이용한 사진전시_2017~9

 

그런데 아빠는? 여전히 소파 위에서 뒹굴뒹굴하면서 “아, 왜 이리 사는 게 재미가 없지?”를 온몸으로 시현한다. 그것이 오늘날 하릴없는 이의 군자로서의 태도라도 되는 양. 사실 이러한 작가의 아빠가 보여주는 모습은 1990년대 시인 황지우가 「살찐 소파에 관한 일기」라는 장시에서 대중문화에 점점 먹혀가고 있는 엘리트문화의 한줌 가치에 대한 자조나 자기풍자가 없다. 그것은 살찐 소파라기보다 늙은 소파라고 해야 할 그 무엇의 시간성이 있지만, 훨씬 더 건강하고 선이 굵다. 마치 보여지고 있는 것 이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면 그럴수록 이 소파의 뒹굴뒹굴은 재미없음의 앞면과 ‘어라, 은근히 재미진대?’ 라는 뒷면이 번갈아가면서 패를 펴보이기 시작한다. 극도로 재미없는 것은 사실 그 재미없음의 파장이 사방으로 번져나가기만 하면 뜻밖의 재미를 풍기는 법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이를 변화의 원리로 채택하고 있고, 박가인 작가는 이를 배워서 진행한다기보다는 그냥 마음에서 튕기는 어떤 소리울림으로, 명주실이 뽑혀져나오는 대로 진행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박가인 작가는 타고난 작가, 천부적인 작가인 셈이다. 이 어울렁더울렁 하는 소파와의 일전을 거의 매일 벌이는 단조로운 무대, 그리고 연기 하지 않는 연기로서 궁극의 연기술을 펼쳐보이는 삶의 복무자, 그리고 단순한 구도의 사진임에도 늘 그 주어진 프레임의 미묘한 비틈과 변주를 추구하는 작가 등 이 삼자관계는 본능적이고 야생적인 결합에 의해서 우리 눈 앞에 차르르 열리는 연속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과거 작가들은 – 1930년대, 40년대생 작가들 – 이렇게 체득된 정신의 가장자리에서 “아, 이거 재밌겠다” “이거 재밌겠는걸” 하는 본능과 후각과 예술이 일체로 범벅된 타입으로 예술 활동을 벌여왔다. 김구림 작가가 그랬고, 주재환 작가가 그랬다. 이제 박가인 작가의 차례인가.

 

박가인_사는 게 왜 이렇게 재미가 없냐_인스타그램을 이용한 사진전시_2017~9

 

가끔 아빠는 낚시를 하러 가신다고 한다. 그럴 때 인스타에 올라오는 사진 속 아빠의 얼굴은 환하게 미소짓다 못해 폭소로 터져버릴 것 같은 표정이다. 낚시라는 것, 강태공이 된다는 것은 역시 군자의 주무기 중에 하나가 아닌가. 그러고 보면, 소파 위에서 눈감고 ‘내용 없는 시간’을 보낸 것은 아직까지 이 세상의 어지러움을 평정하고 다시 새로운 세상의 유토피아를 꿈처럼 가상화할 수 있는 군주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가령, 강태공은 80년간 낚시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지 않은가. 그리고 주나라를 세울 히어로가 나타나자 문득 낚싯대를 던지고 80년간 세상을 평정했다지 않은가.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유장하기 이를 데 없는 동아시아의 삶의 지평, 그 잊혀진 전-자본주의적 태도로 표출되는 경지일지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낚시의 만끽 속에서 그처럼 재미를 넘어 행복감 물씬 풍기는 환한 빛에 감싸일 수 있는가. 물론 우리 시대의 이 강태공은 과거 춘추시대의 강태공과 달리 자기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기도 하다. 천려일실. 그러나 달리 보면, 현대미술에 종사하는 딸에게 보다 쉽게 접근하는 실전적인 팁을 순수하게 던져주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소파 위에서 손바닥만한 속옷 차림으로 뒹굴뒹굴 하는, 어딘지 변태스럽고 어딘지 기괴하며 어딘지 천연스러운 육신의 퍼포먼스를 사진 작업으로 담도록 선선히 허락했을까. 심모원려.

 

우리는 박가인 작가의 이 가족적인 삼각형 구도 내부에서 가부장제의 주인공이 퇴락하면서도 뭔가 우수와 애환을 그 무미하고 무표정한 자태 속에 간추리고 있는 야누스적인 광경세계를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박가인 작가는 애정하고 있는 것이다. 주말 광장을 어지럽게 교란하고 있는 태극기 부대와 심정적 동조를 보내지만 유감스럽게도 소파 위의 오수와 낚시 소일로 광장으로의 출동은 한없이 미뤄질 수밖에 없는 이 가부장은 자신의 역사적 무대가 60년대 70년대 근대화의 바람이 불어오는 공장과 현장에서, 80년대 여전히 그곳에서, 그리고 90년대 여전히 그곳에서 버텨왔지만, 이제 뉴밀레니엄과 세기말 현상은 가부장의 전형적인 이중성 – 가족을 등진 일벌레의 측면과 가족 위에 군림하는 폭군의 측면 – 을 그 늙어가는 시간의 음미 속에서 스스로 소파 위의 잠과 꿈으로 악몽화하고 있는지 모른다. ‘내용 없는 시간’이라는 시간의 무미성, 순간성은 이 악몽화하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우리 눈 앞에는 박가인 작가의 끝없는 사진의 흐름 그 끝에서 늘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기나긴 사진들의 연속 이미지를 차르르 두루마리 펼치듯 펼치면서 동시에 한 순간의 ‘내용없는 시간’, 바로 “아, 왜 이리 사는 게 재미없지?” 라는 고백적이면서도 근본적인 시간성을 범람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현시와 표출이 은근히 재미진다는 것이다. 물극필반. 상황이 극에 달하면, 반대의 성질로 바뀐다.

 

박가인_사는 게 왜 이렇게 재미가 없냐_인스타그램을 이용한 사진전시_2017~9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공간적 이미지만이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으며 현재 안에서 과거를 복원한다는 환상을 우리에게 심어줄 수 있다…

공간만이, 노화되거나 자신의 일부를 소실하는 일 없이 지속될 만큼 충분히 안정적이다.” (모리스 알박스)

 

좋은 얘기다. 안정성, 퇴락해가는 가부장, 시대의 페미니즘에 정면은 아니지만 빗면으로 맞받는 듯한 전형적인 가부장은 안정적인 잠을 청한다. 소파라는 공간적 이미지만이 사진 앵글 속에서 이리저리 그 안정감에 의지하여 실크 스크린 못지 않게 바리에이션을 준다. 안정성은 가부장-군자에게 초연함, 초탈성이다. 그러나 인스타그램의 박가인 사진들은 묻는다. 그는 지금 자리찾기, 기억하기, 확인, 왜곡을 저지르고 있다고. 그는 과거의 안정적인 가부장의 위상에 대해 노스탤지어를 품고 있으며, 소파의 잠이라는 악몽화 전략 속에서 그 노스탤지어가 다시 한번 현실로! 라는 불가능한 소원수리를 하고 있다고.

 

그러면서 동시에 박가인 작가는 가족에 대한 무한한 애정, 마치 플로티누스의 전격적 유출처럼 콸콸 솟아나는 사랑의 파워로 그런 비판적 부분까지도 감싸올린다. 그의 사진은 철저하게 양가적이며, 무심한 듯하면서 감정과잉적이다. 드라이하면서 척척하다. 이 응축되지 않는 면이 끊임없는 사진들의 이어달리기를 가능케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럼으로써 사는 게 재미없이 죽은 것처럼 누워있는 아비를 계속 사진찍고 인스타에 올리는 것 아닌가. 아아, 이는 박가인 작가의 의례 연출이자 사진적 팔림프세스트이다. 즉 사진찍기는 미래의 죽음을 기록하는 작업인 동시에 사랑이 넘치는 구세계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애정이 교차하는 시간의 작업이다. 아아, 어쩌랴. 이제 그만 놓아줘도 좋을 것을.

 

소파는 가죽으로 되어 있는 침묵이고, 나직한 소리와 감촉조차 안으로 여미는 공간적 이미지이다. 노년 남자가 속옷으로 손을 쑥 넣을 것만 같은 위기일발의 순간 속에서도 소파만이 인간보다 더 인간적으로 깨달음의 무미를 예찬하고 있다. 아빠는 그 소파와 한몸이 되고자, 물질적 회귀를 저지르고자 잠의 힘을 빌었고, 그 꿈 속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 낚시는 다시 삶을 낚기 위하여 환한 빛의 표정과 함께 월척을 허락한다. 깨고 나면, 모두 일장춘몽이고, 덧없는 시간임을 아는 자각몽이지만, 이 짓을 멈출 수 없다. 안정성은 너무나 프레자일한 꿈과 낚시이다. 그런 면에서 박가인 작가의 본능은 이 안정성의 사진들을 거느린다. 마음에서 명주실이 뽑혀나오고 그 실이 아름답지 않게 연주하는데, 그게 멋있고 아름답다.